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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주형 Aug 17. 2023

내 선에서 끝내라.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

  '악조건을 즐겨라' 내 18살 좌우명이었다. 서로 눈치 보며 남들이 기피하는 일과 막상 들이닥쳤을 때 1초의 망설임 없는 판단과 행동,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악조건을 즐겼었다. 어쩌면 소수의 사람 중 한 명이라고 볼 수도 있다. 어른이 되어 20대가 저물어 갈 때쯤 "네가 뭐 한다고 그런 짓을 하냐? 바보냐?"라는 말을 종종 듣고는 했을 때 '아, 내 철학이 오지랖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결론은 아니었다. 타인이 느끼기에 오지랖일지 몰라도 내게는 내가 가진 능력치의 일부가 됐던 것이다. 그저 당연한 일, 억지로 짜내는 것이 아니라 되레 만족감을 얻을 수 있었으니까.


  반면 내 기준에서는 보통의 사람들이 이기적이거나 겁쟁이로 느껴질 때가 많았다. 왜냐하면 일반화를 시켜버리기 때문이다. 그래, 현재의 내 위치 '배달원'이라는 직업을 봐도 마찬가지다. 대부분의 사람 95%가 배달원을 혐오한다고 했을 때 나머지 5%는 어떤 사람일까? 해당 직업에 종사해 봤기 때문에 경험이 있고 입장을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거나 내 생각을 예로 들었을 때 이 또한 일반화를 시켜서는 안 되지만 불법을 일삼는 택시 기사님이나 구난차 기사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악의 조급한 마음을 알기에 그 업종을 경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이해하게 된 것처럼 다른 경험을 접목시켜서 마찬가지로 견해와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 


  이러한 내용을 다룰 때면 많은 사람들이 죽자고 달려든다. 그 사실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유턴 신호를 기다릴 때 단속 카메라가 없는 지점에서 내 신호로 바뀔 때까지 수많은 자동차들이 불법 유턴을 돌려 갈 때 항상 나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내 기준에서는 내가 더 정직하고 이러한 내용을 다룰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이해심의 차이가 있다면 경험자와 무경험자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다. 이해의 폭이 진짜 넓은 사람들은 한 가지의 경험으로 열 가지 이상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객관적으로 정의로운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서도 악마가 있고 반면 사회의 악이라고 일반화되는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 중에서도 천사가 있다. 물론 이렇게 뒤바뀌는 경우가 소수지만 배달원 중에서도 좋은 사람이 있으니 악성 배달원과 차별화를 둬야 하고 정의로운 업종 중에서도 생각지도 못한 비리를 일삼을 수도 있다며 차별화를 둬야 한다는 것이다. 교통사고의 최초 목격자, 신고자는 배달원이 많다고 알고 있다. 나 또한 두 명의 목숨을 심폐 소생술로 구했고 정말 오랜 시간 다루고 있는 말이 있다. '세상 어떠한 사람도 먼지 한 톨 안 나오는 사람이 없고 그 먼지 한 톨이 삶을 좌우하는 세상에 살고 있다.'는 내용이다.


  무슨 말이냐면 누군가 내 먼지를 집요하게 털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정상적인 사람이라 착각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내가 엘리베이터를 탈 때 뛰어오는 내가 탈 수 있게 열림 버튼을 꾹 눌러 기다려주는 여성이 있고 닫힘 버튼을 임의로 눌러 충분히 내가 탈 수 있었음에도 나를 보고 허겁지겁 먼저 타고 올라가 버리는 여성이 있다. 비율적으로 봤을 때 기다려주는 사람이 8 올라가 버리는 사람 2 정도가 된다. 인식의 차이인 것이다. 사건 사고가 너무 많은 것도 있고 평소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러한 행동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나는 내가 탈 때까지 기다려주는 여성에게 말한다. "아, 요즘에 선생님 같은 분이 잘 없는데 진심으로 결정적인 순간에 복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지만, 다음부터는 본인의 의심과 촉을 믿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닫힘 버튼 눌러서 빨리 올라가세요." 이 말을 하는 이유가 있다면 입장을 내가 이해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해의 폭이다. 내 누나라고 생각했을 때 엄마라고 생각했을 때 당연한 것이니까. 이 점은 자기 합리화라 볼 수 없이 방어적인 것이니까.


  이처럼 모든 것을 관조할 때 '이해'라는 것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면 상위 5%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얼마 전에는 좁은 시장 골목길에 자동차가 5대 정도 움직이지 못하고 막혀 있자 기동성이 좋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었던 내가 맨 앞에 뭐가 있는지 가봤더니 왠 60대 남자가 드러누워있는 게 아닌가? 나는 그때 배달이 몇 개 밀려 있었음에도 "좀 갑시다 예?"라는 말을 하지 않고 "아버지 무슨 일이신데요? 어디 아프십니까? 저한테 말씀 한 번 해보세요."라며 눈높이를 맞춰 다가갔다. 그랬더니 "아니, 내 뒤에 새끼가 갑자기 경적을 빵 하고 울린다 아이가? 내가 놀랐겠나? 안 놀랐겠나?" 그 말을 듣고는 충분히, 충분히 이해했다.


  나도 경적소리에 한 바탕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운전자가 어떤 사람인지 한 번 살폈다. 20대 남자로 보였고 아직까지는 치기에 충분히 고집도 부리고 기싸움을 벌일 나이라고 생각이 들어 60대 남자에게 "아버지 이 더운 날씨에 충분히 그 마음 이해하고 저도 똑같은 입장에서 열이 확 올랐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비 오고 이런 날 엄청 예민해지는데 조금 늦게 출발한다고 경적 울려버리고 하면 순간적으로 확 하고 악이 튈 수밖에 없더라고요. 아버지, 제가 죄송합니다. 마, 제가 미안하다고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오늘 마, 일어나시고 마음 푸시고 또, 오늘 하루 나머지 몇 시간이라도 좋은 시간 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아버지 가시고 나면 운전자 친구한테는 제가 좋게 타이르겠습니다."라며 타일렀다.


  와중에도 경적을 울렸던 운전자는 "경찰 불렀으니까 경찰이 와도 누워 계신지 한 번 볼게요."라며 도발하기에 내가 한 마디 했다. "선생님 전화 안 끝났죠. 일단 취소하시고 가신다니까 마, 서로 날이 더워서 이렇게 된 거라고 생각하고 두 분이서 악수 한 번 하고 우리가 이 도로에서 빨리 사라집시다. 그게 제일 현명한 판단입니다. 갑시다 얼른요."라며 내 나름 최선의 해결을 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누구는 옆으로 갈 수 있으면 가버리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다른 누구는 그래도 한참 동안 정체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해결을 잘했다고 생각할 것이다. 공간이 협소했지만 오토바이는 충분히 지날 수 있었고 자동차가 그동안에 10대 이상 쌓였으니 운전자 9명은 내게 감사했을 것이다. 이륜차 배달원인 내가 자동차 운전자의 애타는 시간을 아껴 준 것이다. 이것을 오지랖이라고 한다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니까. '너는 너 나는 나' 노래가 있듯이 말이다. 어쨌든 내 해결책에 만족하고 뿌듯했다는 것이 결론이다.


  서론이 너무너무 길어졌다. 어쩌면 연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타인의 인정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남기고 싶다. 이것이야 말로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자신이 경험을 하고 반성을 하고 깨닫고 같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그 마저도 결국에는 나를 위한 것이 될 수 있도록 말이다. 마음에서 우러나지 않는다면 때에 따른 포장과 가식에 서서히 지배당하게 되면서 자신은 병들고 마는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의 환경이 가난했거나 좋지 않은 인성을 가졌거나 의지가 없고 게으르다고 한들 가장 중요한 사실은 다시 말하지만 내 선에서 끝낼 수 있다는 것이다. 허우적거림에도 막상 요령이 생긴다. 강조하고 싶은 게 있다면 시도조차 못 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변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더 성장하고 싶다면 가슴에 힘을 주든 어금니를 깨트리든 이 환경을 더는 이어가지 않겠다는 가짐 하나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오래 걸릴지 몰라도 자신의 환경에 묻혀버리지 말고 그 색깔 그대로 나 혼자서 충분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 한 가지가 결국 온전히 자신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러한 사람이 되면 눈빛부터가 달라진다. 다만, 그러한 사람이 되려면 잠을 잘 자야 한다. 노동이든 자기 계발이든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수면량을 억지로 줄여버리면 안 된다. 저마다 수면량이 어느 정도 정해져 있는데 피곤이 누적될 때 무너질 수밖에 없다. 버틴다고 하더라도 예민함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자신이 원래 4시간을 자는 사람이든, 12시간을 자는 사람이든 깨어있는 순간만큼은 1분의 흘려보냄 없이 온 힘을 기울이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깨어있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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