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주형 Aug 30. 2023

희망도 배신을 한다.

희망이 절망으로 변했던 까닭

  살아가다 보면 품었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뀔 때가 있다. 그 사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더니 자신 안에서 희망을 품었던 게 아니라 외적인 것에 품었기 때문이었다. 외적이라 함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이다. 투자, 미래, 타인 등처럼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것이 타인이다. 돈과 미래는 어떻게든 죽자고 달려들면 해결될 수도 있지만 타인이 절망을 안겨주면 방법이 없다. 그 때문에 적어도 희망을 품을 때는 자신 안에서 품어야 한다. 현실과 나의 가능성 그리고 내 목표 같은 것들로 말이다.


  또 외적인 것에 희망을 품게 됐을 때 절망하게 된다면 모든 원망의 화살은 품었던 희망으로 가게 된다. 실패하거나 무너져도 결국에는 내 탓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치유가 빠르며 다른 방법을 찾기가 수월해진다. 사실 우리의 동심을 깨부수는 문장이 될지도 모르지만 단 한 가지의 희망만을 끝까지 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때때로 바뀌는 생각과 행동 그것에서 쌓여가는 경험이 자신 안에서 변화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우리는 수시로 희망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다 싶으면 다른 희망을 품어야 하니까.


  오래전에 죽고 싶어 하는 사람을 위로하는 글귀를 sns에 올린 적이 있다. 내 글귀를 읽어주는 주된 독자층이 30대 중반에서 60대인데도 불구하고 그 콘텐츠 하나만큼은 수많은 10대 독자들이 어디서 나타났는지 공감했었던 기억이다. 솔직히 말해서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부터 힘들지 않은 사람은 없다. 이러한 아이들처럼 사춘기까지 맞물려 부모와 성적의 압박까지 받는다면 아이들의 희망은 솔직히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디에 있을지 찾을 수가 없다.


  희망이라는 것은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라서 보이지도 않고 알 수 없는 것에 걸지 말고 수시 때때로 바뀔지언정 보이고 안심할 수 있는 것에 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다시 말하자면 아이들의 성적도 어른들의 금전과 자녀도 아닌 오직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부모 또한 아이들에게 희망을 품지 마라. 우리 어른도 사는 게 너무 힘들고 배워본 적 없겠지만 행복이든 노력이든 생각이든 이러한 자신의 것들로 희망을 채울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알려줄 수 있는 어른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내 삶도 너무 힘들었다. 사랑이라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 아직도 모르겠다. 어릴 적 친구집에 놀러 가면 밥상에 소시지가 나왔고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유선 티브이에서 나오는 만화 채널이 죽도록 부러웠다. 그때 품었던 것이 스스로의 희망이었다. "지금 내가 어찌 됐든 살아가야만 또한 살아남아야만 미래가 있을 것이고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해 보자." 왜냐하면 정말이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엉엉 울며 뛰어갈 곳도 도망갈 곳도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살아야 한다는 것에 중점을 두고 그 희망 하나만으로 부딪히는 방법뿐이었던 것이다.


  아까 전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했었는데 만약 당신이 부모라면 부모의 역할은 하나다. "도망갈 공간이 되어주는 것" 다시 말하자면 도망가고 싶은 공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꼴등을 하더라도 잘했다고 칭찬해 주고 실망감을 주더라도 자책하지 않도록 안아줄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가 되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무엇인지 모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희망은 어디에 있겠는가? 부모에게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희망을 스스로 찾을 수 있을 때까지는 아이의 희망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내 희망이 어머니라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 함께 하지 못한 잃어버린 10년을 찾아와야겠다는 신념이었다. 적자가 발생해도 서울 강남구의 1인 평균 급여만큼은 매달 챙겨드렸고 세대차이로 인한 부딪힘이 발생하면 god - 어머님께 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들으며 마음을 추슬렀다. 둘이서 장사를 몇 년 정도 이어올 때쯤 어머니의 장사 철학대로라면 망하는 건 시간문제라는 생각이 들어 내 장사 철학에 어머니를 흡수시켜 보려는 과정에서 마찰이 너무 심해졌다. 그 마찰을 또 몇 년간 겪었고 서로를 병들게 하는 해충이나 기생충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쯤 매우 오랜 시간 끝에 깨달은 결론이 하나 있다.


  다름 아닌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나는 나대로'였다. "이제부터는 희망을 어머니께 품지 말자. 한 공간이지만 각자만의 방식 그 사실 하나만을 가지고 가자." 그리고는 어머니가 내게 해줬다며 생색냈던 모든 것들을 모조리 다 돌려 드렸다. 지난날이 감성과 낭만이었다면 이제부터는 현실로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진짜 제대로 된 리더는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개인의 색을 하나로 합치려는 게 아니라 최대한 나눠 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대신 맞서주고 해결해 주려는 것보다. 스스로 맞설 수 있게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 후로 어머니께 금팔찌는 돌려달라고 했다. "어머니 금팔찌도 들고 계시면 당장 가서 팔아버리세요."라고 말했는데 "알았다. 그러면 팔아서 그 돈 너 줄게."라는 어머니 대답과 눈빛에서 금방에 바로 달려가실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그냥 돌려주세요. 차고 다닐게요." 이처럼 문득 들었던 생각이 내가 어릴 적에 못해줬던 게 죽는 순간까지 마음에 남아 계실 것이고 내 의사와 상관없이 지금이라도 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무언가 해주고픈 마음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얼마나 생색내고 싶었을까?'


  만화 드래곤볼을 보면 손오공과 배지터가 하나의 몸으로 합쳐지는 퓨전이라는 기술로 강한 적을 무찌르고는 하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만화 속의 한 장면이었던 것이다. 결국은 타인에게서 절망감을 느끼지 않도록 개인이 희망이 되어야 한다. 가족과 주변인은 삶에 있어서 매우 소중하다. 그렇지만 나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내가 현실이라면 외적인 것은 감성이다. 결정적으로 현실 안에 감성이 있다는 사실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진짜 이 점을 알 때 참 희망을 깨닫게 되고 그것에서 강한 정신력과 시너지 효과를 불러오게 되는 것이다.


  

이전 21화 내 선에서 끝내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