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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슈맘 Dec 21. 2020

간호대학 가면 취직이 잘된다면서요?

내가 간호사가 된 이유



내가 간호사가 된 이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저는 아픈 사람을 돕는 백의의 천사가 되고 싶어요. 어릴 때부터 남을 돕는 직업을 가지고 싶었고, 평생 헌신하며 봉사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줄 알았다면 오산.......  


사실 나는 초등학교 선생님이 꿈이었다. 교사라는 직업이 멋져 보였다. 그러나 현실은...? 성적이 형편없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면 교대에 가야 하는데, 터무니없는 성적이었다. 게다가 나는 수포였다. 나름 상위권.. 반에서 10등 안에 드는 성적,이었으나 현실을 깨닫고, 교사가 되는 것은 포기했다. 그러다가 내가 미술에 소질이 있다는 걸 알았다.


"엄마~ 내가 미술에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혹시 미대 가는 건 어떨까?"



친정엄마 왈

"미대는 무슨, 나중에 취업하기도 힘들다고 하더라, 너한테는 간호사가 딱이야, 공부 조금 더 해서 간호대학 가자. 간호사 가면 취직도 잘되고, 여자 직업으로서 괜찮다고 하더라."

아.. 그렇구나, 간호사가 취직도 잘 되고, 여자 직업으로 괜찮구나.! 나는 엄마 말 잘 들으니까, 엄마가 하는 대로 해야겠어.


© mikael_k, 출처 Unsplas



진짜 어이없고, 웃긴 일이지만 취업이 잘되고, 여자 직업으로 인정받는 직업이라고 엄마에게 설득을 당해서, 간호대에 가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로 "간호대"에 가기로 결정하면서, 간호사라는 직업이 꾀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고 3 한참 공부하던 시절, 친한 친구와 함께 인하대병원에 찾아가서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같이 사진 찍고 싶다고 부탁을 해서, 사진을 찍었던 적도 있었다. 그 사진을 인화해서 책상 위에 붙여 놓고 진짜 열심히 공부했다.



사실 나는 머리가 좋지 않은 사람이다. 초등학교 때는 구구단을 못 외워서 엄마에게 많이 혼나기도 했고, 시험기간에 남들이 공부하는 것에 두세 배는 열심히 해야 겨우 성적이 나올 정도였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버스에서 영어 단어장을 가지고 다니며 외웠다. 그래서 겨우 간호대에 가게 되었다!


간호대에 들어갔다. 생각보다 너무 재미있었다. 이것은 정말 천직 같았다.   병원 실습 나가는 것도 재미있었고, 수업도 전부 재미있었다. 1학년 때는 장학금도 탔고, 교직 이수도 할 수 있었다.


교직 이수란?? 반에서 상위권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조건으로, 나중에 보건교사 시험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 교직이수를 하게 되면, 초등학교 보건실 실습도 나가고, 아이들에게 보건교육도 할 수 있다. 나쁘지 않은 성적으로 간호대를 졸업했고,  졸업식을 하기 전에 대학병원으로  취직이 되어 버렸다. 

나는 병원에서 일을 하느라고, 졸업식도 못. 갓. 다.


© hush52, 출처 Unsplash


나의 첫 직장은 서울에 대학병원이었다. 집에서 첫 차를 타고 60분을 가야만 했다. 그렇게 삼 년을 다녔다. 분명히 학생 때는 간호사가 천직 같았고, 세상 내가 제일 똑똑한 줄 알았는데, 막상 취업을 하고 현실에 닥치니 내가 생각한 것과는 너무 달랐다.

나는 신생아 중환자실이라는 특수 부서에서 일을 했는데, 그 한정된 좁은 공간에서, 신규 간호사는 여유가 없었다. 힘들었다. 매일 출근하는 길이 "도살장 끌려가는 소" 같았다


" 아 진짜 차라리 교통사고가 나면 좋겠다.

" 전철이 뒤집히면 좋겠어"  

" 내일은 눈이 안 떠졌으면 좋겠어"


가끔 TV에서 대학병원 간호사들이 자살했다는 기사를 보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무 이해가 되더라..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선택을 했을까. 우리나라 간호사 처우 개선은 언제 될 것인가.. 참 안타깝더라. 나를 집중적으로 태우던(괴롭히던) 선배는, 교묘하게 내 동기를 이뻐하면서 나를 미워했다. 근무 표를 보며 하루하루 애간장을 태우고, 그 선배랑 근무를 같이 하는 날에는 정말.. 아침이 오지 않았으면 했다.

그렇게 3년을 딱 채우고 나는 뒤도 안 돌아보고 사직을 했다.


© adamtailor, 출처 Unsplash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근무했던 신생아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아가들은 전부 천사였고 이뻤다.

그러나! 나는 그때 철없는 미혼이었고, 병원생활이 너무 힘이 들었기 때문에, 천사 같은 아이들을 사랑으로 간호하지 못했던 것 같다.  내가 서른 중반이 되고, 아이 둘의 엄마가 된 지금, 만약 다시 신생아실에서 일하게 된다면, 예전처럼 일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첫 병원에서 꼭 나쁜 기억만 있었던 건 아니다. 훌륭한 선배님을 만났고, 친한 동기를 만났고, 대학병원의 생활과 규칙에 대해서 알았고, 23살 약 13년 전에 250만 원이라는 큰 액수의 월급도 받았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대학병원 다니는걸 자랑스러워하셨었다. 그러나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가끔은 대학병원 생활이 그립기도 하다.


나는 자면서 꿈을 많이 꾸는 편인데, 아직도 13년 전 첫 병원에서 있던 장면들이 내 꿈에 나온다.

출근해야 하는데 지각하는 꿈, 신규 간호사인 내가 분홍색 유니폼을 입고 일을 하다가 실수해서 아기의 인공호흡기가 빠졌던 꿈 등등.  13년 전 일들인데도 어쩜 이리 생생한지...


지금 나는 13년 차 간호사이다. 지금 매우 평화롭고, 일을 즐기며, 병원에서 선후배들과도 잘 지내고 있다. 직업의 선택의 후회가 없고 행복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나에게도 힘든 일이 많이 있었구나.! 그 힘든 시간들이 있지 않았다면 지금의 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지나고 보니 내 인생에서 큰 경험이었구나~ 좋게 생각하고 있다.

간호대 다닐 때, 임상 해부학 책을 가방에 넣지 않고 일부로 팔에 끼고 전철을 탔던 철없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는 정말 자부심이 컸었는데.... 나의 초심을 잃지 않는, 환자들을 위한 마음 따뜻한 간호사가 되었겠다는 생각이 새삼 든다.


"우리 엄마는 간호사예요. 병원에서 아픈 환자를 돌봐요" 우리 6세 큰딸이 유치원 선생님께 이렇게 자랑을 했다고 한다.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되어야지.

글을 쓰다 보니, 옛 생각이 많이 났다. 

다소 지루했을 수 있는 글을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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