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로타워, 프랑크프루트에서 라이프치히로
프랑크푸르트에서 라이프치히로
아침 바람이 더 차가워졌다.
프랑크프루트를 떠나는 날이었다. 떠나기 전 유로타워를 안 가볼 수 없어서 일찌감치 일어나 짐을 싸고 프랑크푸르트역으로 향했다. 코인로커에 짐을 맡기고 아침을 먹으러 갔다.
아침 메뉴는 김칫국과 떡볶이. 한국을 떠나온 지 이제 겨우 5일째인데, (사실 중간에 라면도 먹었는데) 그래도 한식이 먹고 싶었다. 특히 못 가져온 김치가 유난히 아쉬웠다.
역 근처의 자그마한 한식당에 들어갔다. 메뉴판을 보니 '갈아 만든 배'가 4유로, 6000원이었다. 아이는 갈아 만든 배가 꼭 먹고 싶다고 했다. 갈아 만든 배와 물, 떡볶이와 김칫국을 주문했다. 한국 가격 생각하니 후들후들했지만 눈을 꼭 감기로 했다. 김칫국 한 숟가락에 속이 시원해졌다. 내가 가끔 집에서 끓여 먹는 김칫국이랑 맛이 비슷해서 놀랐다. 타국에서 이런 맛이 나는 김칫국을 먹을 수 있을지 예상하지 못해서였는지 맛이 더 좋게 느껴졌다. 아이도 떡볶이를 맛있게 먹었다.
기차를 타기 전, 맛있는 한식을 먹었다는 것. 그게 그날의 첫 번째 다행인지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김칫국을 먹고 유로타워를 찾았다. 서울의 고층빌딩에 비하자면 소박한 빌딩 단지였다. 이곳이 '유럽 통화의 심장'이라 불렸다니. 고층 빌딩에 익숙한 우리에겐 그다지 놀라울 게 없는 풍경이었다.
관광객이니 관광객용 사진을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 유로 타워 상징물 앞에 몇 명의 사람들이 줄을 서 있었다. 바람이 많이 불고 날씨가 추워서 얼른 줄에 합류해 사진을 두어 장 찍고는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다.
독일 금융 중심지의 상징적인 고층 빌딩으로, 높이 약 148m에 40층 규모를 자랑한다. 이 건물은 1977년에 완공되었으며, 한동안 유럽중앙은행(ECB) 본부로 사용되며 ‘유럽 통화의 심장’으로 불렸다. 외관은 유리와 금속으로 이루어져 현대적인 인상을 주며, 밤에는 조명으로 유로화 기호가 빛나 도시의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현재는 ECB 본부가 오스트엔트 지역의 신사옥으로 이전하면서, 유로타워에는 은행감독기구(SSM) 등 금융 관련 기관이 입주해 있다. 프랑크푸르트 시내 중심에 위치해 있어 주변에는 마인 타워, 작센하우젠, 짜일 쇼핑거리 등과 함께 관광 명소로도 인기가 높다.
다음 여행지인 라이프치히는 프랑크푸르트와 제법 멀었다.
고속기차로 4시간 정도면 한 번에 도착할 수 있었지만 100유로 정도 요금을 따로 지불해야 했다. 둘이면 200유로. 49유로 티켓으로 움직이고 있는 우리에게는 큰 추가요금이었다. 우리에겐 돈보다 시간이 많으니 시간을 쓰기로 했다. 결국 3개의 기차를 갈아타고, 8시간이 걸려 도착하는 기차 편을 택했다.
49유로 티켓(Deutschlandticket)은 독일 전역의 지역 대중교통을 무제한 이용할 수 있는 월정액 교통권이다. 월 49유로이며, 버스, 지하철, 트램, S-Bahn, RE, RB를 탈 수 있다. 고속열차(ICE, IC, EC)는 사용할 수 없다. 독일 거주자뿐 아니라 여행자도 구매 가능하며, 디지털 티켓 형태로 제공된다. 1일에 시작해 해당 월의 마지막 날짜까지 사용가능하므로 여행 기간을 고려해 잘 선택하는 것이 좋다. 여행 중간에 월이 바뀐다면 새로운 티켓을 구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2025년 1월부터 58유로 티켓으로 인상되었고 2026년 1월에는 63유로로 인상될 예정이다.
여유 있게 역에 도착했지만 기차는 벌써 와 있었다. 기차에 올라 짐을 싣기 좋은 칸에 자리를 잡았다. 기차에 자리가 여유로웠다. 우린 이때까지 앞으로 8시간 동안 여유롭게 독일의 시골 풍경을 감상하며 가게 될 줄 알았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하나둘씩 기차에 오르더니, 출발 시간이 다가오자 모든 좌석이 승객으로 가득 찼다. 곧 서서 가는 승객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독일에는 여러 종류의 기차가 있는데 우리가 가진 49유로 티켓으로 탈 수 있던 RE 기차는 지정석 개념이 없었다. 1등석, 2등석은 나뉘어 있었지만 1등석 표를 끊어서 타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자리가 있건 없건 일단 타면 갈 수 있고 중간중간 역마다 타고 내릴 수 있는 것이 우리나라 지하철 시스템이라 비슷했다. 때문에 서서 가는 사람도 많은 것 같았다. 지정석이 있는 한국의 기차만 생각하다가 사람이 가득 찬 채로 출발하는 기차에 우리는 적잖이 당황했다. 캐리어를 발 앞에 꼭 붙들어 두고 아이가 괜찮은지 살폈다. 다행히 아이는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곤히 잠을 자기 시작했다. 녀석은 제법 예민한 성격을 가진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땐 또 무던하다. 캐리어들이 자꾸 굴러가는 바람에 나는 좀처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두 번째 기차였다. 첫 번째 기차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출발하는 기차라 자리를 잡을 수 있었지만 두 번째 기차는 다른 역에서 출발해 온 기차였다. 그리고 가장 긴 시간을 타야 했다. 역에 있는 카페에서 샌드위치를 사 먹으며 제발 앉아 갈 수 있기를 네 손 모아 기도했지만, 도착 한 기차는 이미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차가 역에 도착하자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고 우르르 다시 탔다. 서 있을 자리조차 마땅치가 않았다. 캐리어를 들고 구석에 자리를 잡으려 바쁘게 움직였지만 사람들에게 밀려 통로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그야말로 미어터질 것 같다는 표현이 딱 맞았다. (이런 기차는 사실 독일 여행 내내 딱 이때 한 번이었다. 혹시 프랑크프루트에서 라이프치히를 가려고 하신다면 웬만하면 고속열차로 가시길) 캐리어를 겨우 앞에 높고 좁은 통로에 섰다. 어딘가에서 자리가 나길 기다리며 버티는데 다행히 앞에 사람이 금방 내렸다. 서둘러 아이를 앉히고 나는 그 옆에서 캐리어에 걸터앉았다.
통로에 짐과 같이 앉아 있어도 불평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고마웠다.
“엔슐디공(죄송합니다)”
모두 인사를 하고 웃으며 나를 비켜 지나갔다. 기차의 움직임에 따라 비틀거리면서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 조용히 가던 사람들 덕에 그 좁고 지친 공간에서 마음까지 불편하지는 않았다. 언어가 아닌 태도로 전해진 서로에 대한 배려. 그게 오늘의 두 번째 다행이었다.
몇 시간 뒤 아이의 옆자리 승객이 내려서 나도 앉을 수 있었다. 발밑에 캐리어를 눕히고, 무릎을 끌어안은 채로 가야 했지만 그래도 눈을 붙일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창밖이 어느새 컴컴해져 있었다.
세 번째 기차를 갈아타야 하는 플랫폼에 도착하자 이미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잔뜩 서 있었다. 다음 기차도 만원일 것이 분명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타야 하나, 보내야 하나. 한 시간 남짓의 거리였지만 더 이상 많은 사람에게 치이며 서서 갈 자신이 없었다. 다리도 아프고, 온몸이 뻐근했다.
“딸, 우리… 이번 기차는 그냥 보낼까? 30분만 기다리면 다음 기차 온데.”
아이에게 말하면서도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내가 아이보다 훨씬 더 못 버티는고 있는 게 분명해 보였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투덜거리지 않고 따라오는 아이를 보며 많이 컸다 생각했지만 아이의 속 마음은 또 모를 일이었다. 혹시나 힘드니 그냥 빨리 가자고 하지 않을지, 그럼 어떻게 해야 될지 아주 잠깐 고민이 되었다. 그런데 말을 들은 아이는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옆에 조용히 앉았다.
"춥지?"
아이의 손을 꺼내 내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우린 귀에 이어폰을 꽂고 각자의 침묵 속에서, 서로의 곁에 있어 주었다.
아이를 키우며 나는 때때로 거창한 성장을 기대했던 것 같다. 혼자서 근사한 무언가를 해내거나, 누군가를 감동시키거나, 눈에 띄게 변하는 가시적인 무언가의 것들. 하지만 아이의 성장은 봄이 오면 소리 소문 없이 녹아 싹을 틔울 준비를 하는 땅의 흙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는 어느새 힘들어하는 동행자의 곁에서 그냥 아무 말 없이 함께 기다려 줄 수 있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니.'
지난 시간 속에서 나를 자주 지치게 했던 너라는 동료를 나는 마음으로, 때론 모진 말로 얼마나 자주 타박했던가. 돌아보니 나는 아이에게 좋은 동행자가 아니었던 적이 많았던 것 같았다.
'좀 더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한숨이 슬쩍 새어 나왔지만 이내 다시 야무지게 숨을 들이켰다. 후회가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아이들을 키우는 모든 순간이 최선이었으니까. 자책하지 않으려 다시 한번 큰 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가 콧구멍을 타고 넘어와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너를 키우며 나도 크느라 고생이 많았다. 앞으로 네가 스스로 자라 갈 시간들 속에서 나는 미안할 일만 잔뜩 남은 것 같았지만, 그땐 또 기꺼이 네게 사과를 해야지.'
주머니 속에 네 손을 더 꼭 잡았다. 둘의 하얀 입김이 공기 중에 부서졌다. 피곤한 몸과 지친 마음으로 함께 앉아 있다는 것, 말이 없어도 서로 고생한 하루를 이해해 준다는 것, 그건 정말 따뜻한 일이었다. 기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차디 찬 바람을 가르고 우리 앞을 지나갔지만, 내 마음은 세상이 잠시 멈춘 듯 고요했다.
다음 열차에는 주황색 DHL 유니폼을 입은 사람들이 무리 지어 앉아 있었다. 아마도 밤에 일하러 가기 위한 출근길인 것 같았다. 다행히 그들 곁에 우리 둘을 위한 빈자리가 있었다.
라이프치히에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기운이 바닥을 찍은 지 한참 지난 뒤였다. 독일에 도착하면서부터 걱정했던 한꺼번에 몰려올 여행의 피로가 그 밤에 우릴 찾아온 것 같았다. 미리 예약해 둔 숙소는 다인실이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우리는 우리만에 공간이 절실히 필요했다.
"저기요, 혹시 2인실 남은 거 없나요?"
프런트에 있는 직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아... 한번 볼게요. 지금 2인실은 없고 4인실 하나 남아 있긴 하네요. 그런데 가격이 좀 있어요.”
한참을 검색하던 직원이 말했다. 처음 제시한 가격은 생각보다 너무 높았다. 평소 같으면 그냥 포기했을 텐데 너무 간절해서 한번 더 말을 꺼냈다.
"우린 여행 중인 모녀예요. 지금 프랑크프루트에서 오는 길인데 하루가 너무 힘들었어요. 개인실을 꼭 쓰고 싶은데 가격이 생각보다 좀 높네요."
"아. 프랑크푸르트가 제법 멀죠. 음... 당신들은 오늘 운이 엄청 좋네요. 내가 이 호스텔 사장이거든요. 원래 프런트에는 주로 직원들이 있는데 지금 잠깐 제가 있는 거예요."
"아, 정말요?"
"두 분 예산은 얼마나 돼요?"
우리의 퀭한 눈을 살피던 사장님이 웃으며 되물었다. 나는 원하는 가격을 말했고 사장님은 잠시 생각하더니 내가 제시한 것보다 조금 더 높은 가격에 방을 내어 주겠다고 했다. 한국인이라 특별히 싸게 해 준다는 말과 함께. 조금 망설이다가 결국 오케이 했다. 3박에 1인당 100유로씩 더 지불했다. 기차표에서 아낀 돈을 거기에 쓴 것이다. 기차표 아낀 게 신의 한 수라고 해야 할지, 어리석은 짓이라고 해야 할지 아리송했지만, 우린 개인실을 얻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기뻤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이게 오늘의 세 번째 다행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넓은 방, 편안한 침대와 침구, 단독 화장실. 그리고 무엇보다 정말 간절히 필요했던 진짜 고요함. 그날 우연히 잡은 그 방이 한 달 여행을 통틀어 가장 좋은 방이었다.
따뜻한 방에서 (마음도, 실제 온도도) 침대에 누워 하루를 회상했다. 고단한 하루 속에 만난 세 번의 다행, 그리고 서로가 곁에 있다는 게 짐이 아니라 힘이 되었다는 사실이 잔잔한 기쁨이 되었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들어서자 고슬고슬하고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느껴졌다.
'여행이라는 건, 어쩌면 이런 '다행'이라는 스테이플러로 많은 고단함의 시간들을 엮어 가는 게 아닐까. 힘이 되는 동행자와 함께라면 더 좋고.'
잠이 들려는 찰나, 어쩌면 우리 인생도 여행과 다르지 않겠다는 생각이 슬그머니 떠 올라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