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슈테델 미술관, 센켄베르크 자연사 박물관, 아펠바인
프랑크프루트_2
햇빛에 지면 온도가 살짝 올라갈 시간, 열 시쯤 숙소를 나섰다.
“우와, 골목이 너무 예쁘다.”
트램에서 내려 미술관까지 가는 길에 아이가 말했다. 초겨울의 익숙한 날씨 속에서 보는 익숙하지 않은 도시의 골목길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무들은 단풍이 든 잎을 아직 다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앙상해진 가지 끝에 붉고 노란 고운 색의 잎들이 바람을 타며 가볍게 흔들렸다.
골목 양옆으론 오래된 주택과 현대적인 건물이 뒤섞여 서 있었다. 서로를 억지로 섞으려 하지도, 배척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각자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오래된 발코니에 걸린 푸르게 살아 있는 화분, 기존의 기둥 위에 얹힌 현대식 건물. 모든 풍경이 이질적인 듯하면서도 또 묘하게 조화로웠다. 이 도시는 과거를 밀어내지 않고도 새로운 것을 들여놓는 이해의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걸음을 옮길수록, 발끝을 스치는 낙엽만큼 마음에 쌓이는 것이 많아졌다. 이미 지나온 알고 있는 감각들, 미래에서 나를 만날 알 수 없는 감각들까지. 둘 다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은 묘한 시간이었다.
이 골목에게 나는 잠시 스쳐가는 여행자 이겠지만, 나는 이 골목을 오래도록 기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으로 현재의 느낌이 담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을 기록할 다른 획기적인 방법이 없었기에 나는 사진을 찍었다. 그 사실을 무척 아쉬워하면서....
골목을 지나 마인강 다리를 건넜다. 바람이 불었지만, 강물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강을 건너자, 조금 떨어진 곳에 미술관이 보였다.
흰색과 연회색의 벽면을 가진 건물은 명성에 비해 무척 단정하고, 담백한 외관을 가지고 있었다. 중앙에 둥글게 열린 현관과 길게 걸린 전시 플래카드들이 이곳이 미술관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슈테델 미술관(Städel Museum)은 약 700년에 걸친 유럽 미술의 흐름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1815년 은행가이자 예술 후원가였던 요한 프리드리히 슈테델에 의해 설립되었으며,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회화, 조각, 판화 등 방대한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보티첼리, 렘브란트, 모네, 고흐, 피카소 등 세계적인 거장들의 작품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미술관 입구에서 뮤지엄 패스를 구매했다. 독일의 박물관은 한국처럼 저렴하지 않았다. 하루에 박물관을 두 군데만 둘러보더라도 가더라도 뮤지엄 패스를 구매하는 편이 훨씬 저렴했다.
안내원의 안내를 따라 관람을 시작했다. 어찌나 넓고 볼 게 많던지 한 층을 겨우 둘러봤을 뿐인데도 다리가 아파올 정도였다. 중간중간 의자가 보일 때마다 앉아서 쉬어 가며 관람을 해야 했다. 각자의 속도대로 관람을 하느라 아이와 나는 점점 멀어지게 되었다. 나중엔 서로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서 가끔 같은 동선에서 마주치면 장난스럽게 인사를 했다.
그러다 나는 한 그림 앞에 멈춰 섰다.
한 중세 여인의 초상화였다. 그녀는 어딘가 모르게 슬프고 고단해 보였다. 귀족적인 손짓, 그것과 어울리지 않는 표정. 그녀는 마치 ‘어떤 삶도 쉽지 않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지쳐 보이지 않았다. 생각에 잠긴 듯한 눈동자, 굳게 닫힌 입술, 고뇌하는 미간은 그녀의 단단함을 보여주고 있었다. 어떤 삶이 그녀를 덮쳐도, 그녀는 끝내 살아내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존귀는 쉽게 그녀를 떠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나도 당신처럼 살고 싶군요. 그럴 수 있을까요?’
나는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물론이지.’
그녀의 대답이 마음속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600년 전의 그녀가, 나를 위로했다. 나는 그녀에게 눈으로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루크레치아 보르자 (Lucrezia Borgia), Anselm Feuervach 작.
루크레치아 보르자(1480–1519)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딸로,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살아간 귀족 여성이다. 그녀는 가족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세 번 정략결혼을 했고, 종종 독살과 근친상간 같은 음모의 중심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 연구자들은 그녀를 권력에 휘둘리면서도 지적이고 예술을 사랑한 여성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페라라 공작부인이 된 이후에는 지역 문화와 정치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루크레치아는 오늘날까지 비극적이면서도 매혹적인 인물로 예술과 문학 속에 자주 등장한다.
미술관이 워낙 넓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파왔다. 마인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카페에서 점심으로 샌드위치를 먹으며 커피를 마셨다.
아이와 나는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며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자연사 박물관으로 향했다.
트램을 타고 가는 길, 창밖엔 공원이 자주 눈에 띄었다. 프랑크프루트는 독일 내에서도 큰 도시인데 고층 건물이 많지 않다는 게 신기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프랑크프루트는 독일에서 그나마 고층건물이 많은 도시였다.
창 밖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여기 아이들은 얼마나 많이 뛰어놀까?’
트램과 버스에서 아이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삼삼오오 모여서 대중교통을 타고 등하교를 하는 모습이 귀여웠다. 서울에 가면 항상 '아이들은 다 어디 갔을까?' 궁금했는데, 그와 대비되는 모습이었다.
도시 곳곳에 공원이 많다는 건,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 ‘틈’이 많다는 뜻이겠지. 삶에 '틈'이 자주 있다는 건, '쉼'도 자주 가질 수 있다는 뜻이 아닐까.
입구를 들어서자마자 거대한 공룡 화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절반 이상이 진품 화석이었다. 트리케라톱스 두개골 화석을 지나 에드몬토니아가 미라로 남은 화석 앞에까지 오자 간절히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막내가 이걸 보면 얼마나 좋아했을까?’
박물관 한쪽엔 직접 만져 볼 수 있는 진짜 화석도 있었다. '우와, 우와!' 감탄사를 연발하며 여기저기 구경하기 바쁠 막내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다.
한국에서 아이와 함께 자주 찾던 자연사 박물관엔 대부분 모형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곳 아이들은 진품 화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고, 만질 수 있다니. 이런 아이들은 어떤 생물학자가 될까? 부럽다는 표현을 쓰지 않을 수가 없는 시간이었다.
1907년 개관한 독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자연사 박물관 중 하나로, 생명의 진화와 다양성을 깊이 있게 탐구할 수 있는 공간이다. 특히 원본 공룡 화석과 실제 크기의 골격 전시가 풍부해,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공룡 전시 컬렉션을 자랑한다. 일부 전시는 실제 발굴된 화석 그대로를 공개해 생생한 과학적 현장을 체험할 수 있다. 또한 세계 최대 수준의 조류 표본과 함께 인류 진화, 해양 생태, 기후 변화 등 다양한 주제를 과학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크기의 공룡 골격과 희귀한 공룡 미라(예: 에드몬토사우루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출토된 완벽한 화석들도 있다.
독일의 겨울은 날마다 조금씩 깊어지고 있었다. 다섯 시밖에 안 되었지만 박물관 밖은 이미 캄캄했다. 다리가 무척 아팠지만, 숙소로 돌아가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아펠바인 마시러 가자!"
우린 조금 더 힘을 내서 걸어보기로 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유명한 사과와인(아펠바인). 이 도시를 떠나기 전, 우린 아펠바인을 꼭 마셔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작센하우젠으로 향했다.
아펠바인(Apfelwein)은 독일 헤센 주의 전통 사과주로, 프랑크푸르트에서는 맥주보다 흔하다. 작센하우젠은 아펠바인 선술집들이 모여 있는 아펠바인의 본고장 같은 곳이다. 도수는 5~7% 정도, 맛은 새콤하고 드라이하며 단맛이 거의 없다. 전통 도자기 병 ‘벰벨’에 담아 유리잔 ‘게르립테’에 따라 마신다.
식당 입구가 잘 보이지 않아 헤매다가 시끌시끌한 소리에 입구를 찾을 수 있었다. 식당에 들어서야 테이블마다 현지인들이 가득 차 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대화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다.
“어디서나 조용하더니. 독일 사람들은 아펠바인 마시면서 이렇게 수다를 떠나봐 봐.”
내 말에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메뉴판을 독서하듯 들여다보며 무슨 메뉴를 시켜야 좋을지 고민했다. 독일 메뉴판은 이상하게 사진이 없었다. 우리가 더듬더듬 메뉴판을 읽는 모습을 보고 웨이터리스가 다가와 주문을 도와주었다. 프랑크푸르트 전통 소시지와 독일식 피자, 사과주스, 아펠바인을 주문했다. 옆 테이블의 으깬 감자 위 소시지가 무척 맛있어 보였지만 차마 ‘저거랑 똑같은 거 주세요.’라고 말하지 못했다.
아펠바인은 새콤하고 드라이해서 포도 와인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짭짤한 독일 음식과 궁합이 좋았다. 후식으로 아이스크림까지 야무지게 먹고 친절한 웨이터리스에게 팁을 주고 나왔다.
식당을 나서자 아까보다 공기가 훨씬 추워졌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손은 주머니에 쿡 찔러 넣었다. 너무 많이 걸어서 감각이 무뎌지고 있는 다리를 살살 달래 다시 걸었다.
돌아가는 트램 안에서 아이는 자주 구글 맵을 드려다 보았다. 낮에 일이 생각났다. 너무 태평하게 엄마만 따라다니는 것 같은 아이에게 '너도 뭔가 역할을 해야지. 엄마가 혼자 다 하기는 힘들잖아.'하고 타박을 했었다. 평소엔 꾸벅꾸벅 졸며 따라다니던 아이가 신경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 이제 내려야 돼."
아이 말을 따라 서둘러 트램에서 내렸다. 길을 안내하는 아이의 모습이 미안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대견했다. 앞서 걷는 녀석의 뒷모습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걸음이 제법 단단했다. 그 순간, 나는 앞으로 이런 날이, 네가 나를 앞서 걷는 지금 같은 순간이 훨씬 많아질 거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날 밤, 따뜻한 물줄기 아래에서 샤워를 하며 생각했다.
'나는 이 여행을 왜 왔을까? 내가 세운 이유 말고, 운명이 나를 이 여행으로 이끈 이유는 무엇일까?'
샤워 부스를 가득 채운 수증기 속에서 한 가지 이유가 아스라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너를 제대로 한번 들여다봐.'
놓아야 할 것,
쥐어야 할 것,
포기해야 할 것,
누려야 할 것들.
한번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간이 지금 내게 허락된 게 아닐까.
사람은 대부분 낯선 곳에 닿았을 때, 익숙해서 놓치고 살았던 것들을 다시 들여다보게 된다.
처음 대면한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그림 앞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확인받고,
매일 보던 아이의 뒷모습에서 새삼스런 단단함을 발견했던 것처럼.
머리를 말리고 나오자 아이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네 속도로 걸을 수 있게 너를 기다릴 수 있는 엄마가 돼야 할 텐데... 될... 수... 있... 을까...?’
잠든 아이의 얼굴을 보고 혼잣말을 하다가, 여전히 생각대로는 안 되겠지 싶어 혼자 피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