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프루트 돔, 괴테 하우스, 하우프트바헤, 클라인마르크트할레
프랑크프루트_1
아침 6시부터 눈이 떠졌다.
8시간의 시차, 지금 한국은 오후 4시니 당연했다.
밖은 여전히 어두웠다. 다행히 아이는 나보다 잘 자는 것 같았다. 호스텔에 공용공간에 나와 컴퓨터로 이것저것 일을 했다. 마감을 못하고 온 일들을 마무리 짓느라 마음이 분주했다.
30시간의 이동, 평소보다 모자란 수면시간에도 불구하고 컨디션이 썩 나쁘지 않았다. 달리다 보면 느낄 수 있다는 '러너스 하이'처럼 '트레블 하이'상태 속에 있는 게 틀림없었다. 익숙해진 후 한꺼번에 몰려올 피곤이 조금 걱정되었다.
딸도 한국에서보다 훨씬 일찍 일어났다. 여행 첫째 날, 캐리어 안에 있는 햇반과 반찬 몇 가지로 아침을 후다닥 챙겨 먹고 우린 경쾌하게 길을 나섰다.
트램을 타고 도심으로 나왔다. 어젯밤에 도착했으니 밝은 독일의 낮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창 밖에 풍경이 모두 다 새로워서 우리의 눈동자는 거리를 속속들이 흝기에 바빴다.
트램에서 내려 골목을 걸었다. 조금 걷다가 코너를 돌자 붉은 벽돌의 거대한 고딕 양식 건물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건물 앞쪽으로 돌아가자 첨탑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 있었다.
"우와!"
처음 보는 유럽 성당의 모습에 둘 다 고개를 한참 추켜 들었다. 한눈에 담기지 않을 만큼 웅장했다. 카메라를 들어도 프레임에 다 담기지 않았다. 가이드북 속에 있는 조그마한 사진이 야속했다. 이 웅장함을 어떻게 그 조그만 사진과 몇 줄의 소개로 끝낼 수 있단 말인가. 한동안 고개를 잔뜩 추켜들고 서 있었다.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도 묘하게 찌릿했다.
매일 살아내던 일상에서 훌쩍 멀어졌음이 그때서야 비로소 실감 나기 시작했다.
성당 내부는 고요하고 웅장했다. 십자가, 각종 조각들, 파이프오르간, 고해성사실 등등 천주교를 잘 모르는 나는 아직 성당 안의 여러 모습들이 낯설었다. 피아노를 사랑하는 딸은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프랑크푸르트 돔(Frankfurter Dom)은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큰 고딕 양식의 성당이다. 정식 명칭은 '성 바르톨로메오 대성당(Kaiserdom St. Bartholomäus)'이지만 보통 프랑크푸르트 돔이라고 부른다. 이 성당은 신성 로마제국 황제들이 대관식을 올린 장소로 유명하다. 높은 종탑에 오르면 시내 전경을 360도로 볼 수 있다. 내부는 화려하진 않지만 엄숙한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전쟁 때 한 번 크게 무너졌다가 다시 복원되었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온 우리는 야심 차게 종탑에 오르기로 했다. 종탑 입구 매표소에는 한 노신사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책을 넘기는 그의 손길이 어찌나 고요한지 말을 걸어도 될까 잠깐 망설였다. 티브이, 스마트폰, 라디오 중 그 어느 것도 아닌 고요히 책을 읽고 있는 노신사라니.
“엄마, 진짜 독일 같다.”
아이가 내게 조용히 속삭였다. 생각해 보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닌데 우린 왜 이 모습이 감격스러울까. 그의 머리 위에 있는 전구색 조명 때문일까. 그저 낯선 풍경이기 때문일까.
멋진 노신사는 인사도 상냥했다. 그에게 다가가 표를 끊고 우리는 종탑을 올랐다.
반복해서 나오는 좁다란 나선형 계단. 호기롭게 시작한 것도 잠시 서서히 숨이 차고, 다리가 뻐근해졌다.
"중세시대엔... 일부러 이렇게... 나선을 왼쪽으로 돌게 만들었데... 그래야 오른손잡이 군인이... 내려오면서... 방어하기가 좋으니까... 헥헥"
"나도... 알아... 그래서 왼손잡이가... 인기가 많았데... 어디서 봤어... 헥헥"
우리의 말소리와 신음소리가 좁은 계단을 가득 채웠다. 우리는 서로에게 기대고, 서로를 당겨주며 낄낄낄, 헥헥헥 거리며 계단을 올랐다.
'네 덕분이네. 이런데도 다 오고. 혼자면 내가 여길 올라왔겠니?'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했다. '언제 크나. 언제 크나.' 주문을 외우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녀석은 어느새 좋은 여행메이트역할을 톡톡히 해 내고 있었다. 불안하고 좁고, 자꾸만 제자리를 도는 것 같이 느껴졌지만 가끔 나오는 작은 창을 통해 밖을 볼 때마다 꽤 빠르게 올라가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와...... 합...!"
꼭대기에 있는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거센 바람이 목구멍을 막았다. 눈도 뜨기 힘들 정도였다. 위험하진 않았지만 좁은 통로는 여전해서 붙잡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간신히 서서 바라본 도시는 온통 잿빛이었다. 뾰족한 지붕, 마인강, 낮게 깔린 구름, 회색 하늘. 말로만 듣던 전형적인 유럽의 겨울 모습이었다.
“엄마, 우리가 또 탑에 오를까?”
“우린 방금 이번 여행의 유일한 탑에서 내려왔어. 축하해.”
종탑에서 내려온 후, 후들거리는 다리를 붙잡으며 아이와 얘기했다. 그 뒤로 우린 엘리베이터가 없는 탑은 다시는 오르지 않았다.
하우프트바헤(Hauptwache)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심에 위치한 유명한 장소의 이름이다. 원래 1730년경 도시 방어를 위한 "주방위대 본부(Hauptwache)"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 위병소, 교도소, 경찰 본부 등의 용도로 사용되던 건물은 현재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지하에는 주요 지하철과 국철이 교차하는 교통 중심지 역할도 하고 있다. 쇼핑 거리인 자일(Zeil)과 연결되어 있어 시민들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번화한 장소이다.
우리는 여행 초짜니까, 그리고 첫날이니까. 당연히 점심은 관광객들이 많이 가는 유명한 식당을 찾아갔다. 책을 몇 번이나 보고, 후기도 꼼꼼히 읽고 갔다. 바가지를 잘 씌운다는 후기에 긴장을 바짝 하고선.
영어를 잘 못하면 무시한다길래 최대한 혀를 굴려 메인요리에 사이드 디쉬, 소스까지 주문을 했는데. 이런, 결국 똑같은 슈니첼이 두 개 나왔다. 뭐 어쩔 수 없지. 서로를 쳐다 보고 한번 피식 웃고는 맛있게 먹었다. 슈니첼 맛은... 음... 건조한 돈가스맛? 신경을 바짝 쓴 탓인지 다행히 바가지는 안 쓰고 무사히 넘어갔다.
점심을 먹고 괴테하우스로 향했다. 독일 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괴테, 명색이 글을 쓰겠다는 사람이 괴테를 궁금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금 걸어서 도착한 괴테하우스. 입구를 찾는 일이 난제였다. 한눈에 보아도 역사가 듬뿍 담겼을 것 같은 문고리를 붙들고 힘을 쓰고 있는 우리를 보고 길건너에서 대화를 나누던 중년의 여성 두 분이 큰 소리로 말을 건넸다.
"잇츠 낫 데얼! 넥스트 도어!"
옆에 문을 열고 들어가라는 뜻이었다. 이렇게 번듯한 문고리를 당기지 않을 재간이 있나. 나 원 참.
문을 알려준 분들께 땡큐를 다섯 번쯤 외치고 제대로 된 입구를 찾아 들어왔다. (혹시나 이 글을 읽고 괴테하우스를 가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꼭 명심하시길. 괴테하우스 입구는 아주 현대적인 유리 자동문이란 사실을. 그 옆에 있는 올드한 괴테하우스의 나무 대문은 결코 열리지 않는다.)
입구로 들어와 뻥 뚫린 공간을 두리번거리던 우리는 매표소의 노신사와 눈이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이리 오세요.”
그는 우리를 보더니 대뜸 한국어로 인사했다. 우리는 깜짝 놀라며 물었다.
“한국 사람인 거 어떻게 아셨어요?”
내가 묻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비코우즈 유 아 쏘 뷰티풀(당신은 매우 아름다우니까요). 당신도 아름답고, 옆에 친구도 아름답죠. 그러니까 당신은 한국인이에요. 한국인들은 다 아름다워요.”
한국에서도 못 들어본 그런 표현을 이곳에서 듣다니. 대체 이 나라의 노신사들은 왜 이리 멋있는 건지(아직 둘 밖에 못 만났지만.). 우리를 바라보는 그의 미소는 치즈케이크처럼 부드러웠다.
'아름'이라는 이름으로 살고 있는 내게 '아름답다(물론 그는 뷰티풀이라고 했다)'의 '아름'은 남다른 단어이다. '아름'의 어원 중에 하나가 '개인, 나 자신'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름답다'라는 말은 '참 나답다'라고 말과 같다. 어쩌면 그는 들어오면서부터 두리번거리던 우리에게 가벼운 위로를 건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전혀 모르는 독일어와 부족한 영어로 설렘과 불안함 사이 그 어딘가를 떠돌고 있던 여행 첫날의 우리는, 그의 호의에 조금 긴장이 풀 수 있었다.
괴테하우스(Goethe-Haus)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중심부에 위치한 문학 박물관이다. 독일의 저명한 시인 겸 극작가인 요한 볼프강 폰 괴테의 생가이다. 이곳은 괴테가 1749년 8월 28일에 태어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낸 장소로, 그의 초기 작품인 '괴츠 폰 베를리힝겐',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그리고 '파우스트'의 초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 1733년부터 괴테 가족의 거주지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3월 22일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원래의 모습대로 복원되었으며, 내부에는 당시의 가구와 예술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18세기 프랑크푸르트 부유층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괴테 하우스에 대한 소감을 적자면, 괴테씨는 사실 대대로 엄청난 부자였다는 사실! 집안 곳곳에 당신 부유층이 누렸을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리고 괴테하우스 건물은 놀랍게도 2차 세계대전 이후에 다시 지은 복원건물이다. 가구는 폭격 전에 미리 옮겨 두어서 진품이 많다고 한다. 이후로도 계속 감탄했지만 독일의 복원기술은 정말 놀라웠다. 폭격이 있을 거라는 소식을 듣고 집구석구석의 치수를 재어 기록해 놓았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괴테하우스에서 나와 독일 민주주의의 발원지라는 파울 교회에 들렀다. 이곳은 '국민대표들의 행진'이라는 벽화가 유명한 곳이었다. 양복 입은 가드를 지나 교회에 들어선 후, 한참을 말없이 그림을 둘러보았다.
둥근 벽을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정장 차림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국민의 대표들이었다.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어깨를 잔뜩 올린 사람, 입술을 다문 사람, 눈을 굳게 감은 사람. 그들의 각기 다른 표정에서 자부심과 두려움, 책임과 고독 등 여러 가지 감정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오랫동안 천천히, 한 사회를 앞으로 움직인 얼굴들이었다.
파울교회(Paulskirche)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위치한 붉은 벽돌 원형 건물이다. 1848년 독일 최초의 국민의회가 이곳에서 열리며 독일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알려졌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지만 전후에 복원되었고, 종교 시설이 아닌 기념·전시 공간으로 쓰이고 있다. 독일인들에게 파울교회는 자유와 시민정신, 민주주의의 출발점을 상징하는 역사적 건축물이다.
파울교회 내부를 둘러싸듯 설치된 벽화는 요하네스 그륏츠케(Johannes Grützke)가 1989~1991년에 제작한 '국민대표들의 행진(Der Zug der Volksvertreter)'이다. 1848년 파울교회에서 열린 독일 최초의 국민의회를 기념하며, 시민을 대표해 민주주의를 세우려 했던 이들의 발걸음을 형상화했다. 약 32미터 길이의 거대한 프리즈 형식으로, 둥근 벽면을 따라 수십 명의 인물이 줄지어 행진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물들은 각기 다른 표정과 태도를 지니며, 민주주의가 다양한 시민들의 책임 있는 참여로 이루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파울교회에서 나와 크리스마스 마켓 준비로 정신이 없는 뢰머광장을 지났다. 언뜻 보아도 크리스마스 마켓 준비를 성대해 보였다. 여행 막바지에 다시 프랑크푸르트에 머물 예정이라 그때 볼 크리스마스 마켓 기대되었다.
동네시장이라는 클라인 마르크트 할레를 찾아가던 길에 도시 가운데 우뚝 서 있는 에센하이머 탑을 만났다. 오른편으로 꺾어 돌아야 했지만 우린 21세기 거리 위에 우뚝 서 있는 15세기의 탑 앞에서 냉정하게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에센하이머 탑(Eschenheimer Turm)은 15세기 초에 건축된 원형 그대로의 구조물을 유지하고 있다. 이 탑은 프랑크푸르트의 중세 성곽의 일부로, 15세기 초반에 건축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동안에도 큰 손상을 입지 않은 몇 안 되는 건축물이다.
15세기가 건축된, 복원품도 아닌 진품이다. 600년 가까이 자리도 옮기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고 한다. 아스팔트 도로 위 신호등이 깜박이고, 자동차가 달리는 이 시대의 풍경 속에 중세의 탑이 서 있는데 가까이 가보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현재 1층에는 카페 겸 레스토랑이 운영되고 있었다.
지금 이 풍경이 이질적인가? 아닌가? 헷갈리는 일이었다. 고층빌딩이 즐비한 서울에 와서 길을 걷다가 남대문을 만나면 외국인들은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어렴풋이 짐작을 해 보았다.
에센하이머를 지나 6시가 되기 전에 서둘러 클라인마르크트할레에 들렀다. 역사가 깊은 시장인 이곳은 여전히 활발히 운영되고 있으며 6시면 문을 닫는다. '클라인'은 독일어로 '큰', '마르크트'는 '시장'이라는 뜻이다.
클라인마르크트할레(Kleinmarkthalle)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심에 위치한 실내 시장으로, 관광객뿐만 아니라 현지인도 많이 찾는 장소이다. 1,500제곱미터, 약 156개의 판매대가 자리하고 있다. 신선한 농산물, 고기, 치즈, 빵, 꽃 등 상품이 매우 다양하다. 원래의 시장 건물은 1879년에 네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1944년 제2차 세계 대전 중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1954년에 재건되어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여전히 애용하는 시장으로 자리 잡고 있다.
현지인들도 많이 이용하는 재래시장이라 그런지 끝날 시간이 거의 다 되었는데도 오가는 손님들이 많았다. 빵, 고기, 소시지, 와인, 치즈, 디저트 등등. 구경할 거리가 끝도 없었다. 주방이 있었다면 한가득 장을 봐서 요리를 해 먹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호스텔 방한칸 여행자에겐 그림의 떡이었다.
다리가 도저히 못 버티겠다 아우성을 칠 때쯤, 우리는 시장 안 한 가게에 앉아 수프와 커피를 시켰다. 말이 안 통해서 손짓 발짓으로 주문을 했다.
진초록 눈을 가진 백인 아주머니는 초록색 수프와 빵을 가져다주었다. 처음 먹어보는 신기한 맛이었지만 날씨가 추웠기에 따뜻하다는 것 만으로 충분했다.
"빵 더 줄까? 불편한 건 없어?"
가게 주인이 독일어로 묻는 것 같았다. 우리가 눈만 깜박이자 그녀는 손짓, 발짓을 동원해 다시 물었다. 서로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미소와 몸짓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많은 순간, 말보다 마음이 먼저라는 것. 어쩌면 우린 그걸 배우려, 혹은 잃어버린 그 사실을 다시 깨달으러 여행을 떠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