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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모자

뷔텐베르크

by 주혜나

뷔텐베르크


라이프치히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는 날이다.

아침 일찍 서둘러 숙소를 나섰다. 아쉬운 마음으로 고서적을 파는 서점을 지나쳤다. 이번 여행에서 배운 교훈이 하나 있었다. 그건 여행은 결코 많이 보는 것도 저렴한 걸 찾는 것도 아닌, 지치지 않도록 자신을 잘 조절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라는 사실. 지난번 열 시간에 가까운 이동을 겪은 후, 우린 마음과 환경을 다스리는 일이 여행의 절반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런 이유로 베를린으로 곧장 향하지 않고, 중간에 작은 도시에 들르기로 했다. 이름조차 생소한 곳, 뷔텐베르크.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도시라고 했다. 이름의 뜻은 ‘흰 산, 밝은 산’—듣기만 해도 정갈한 이미지가 그려지는 이름이었다.


뷔텐베르크_마틴루터의 도시

한산한 기차를 타고 뷔텐베르크역에 도착했다. 카페와 편의점이 하나씩 있는 아담하고 조용한 역이었다. 코인락커가 있어서 천만다행이다 싶었는데... 고장이었다. 2유로씩을 넣었지만 두 칸 중 한 칸만 잠기고, 다른 한 칸은 잠기지 않았다. 편의점과 카페 사장님께 물어보았지만 잘 모르겠다고 했다. 캐리어 내용물을 기억해 보았다. 한국에서 챙겨 온 김, 고추장, 동결건조 국과 라면... 옷가지 몇 개. 누군가가 가져간다면 그중 캐리어가 가장 비싼 물건일 것 같았다. 잠시 고민 끝에 락커를 잠그지 않고 그냥 길을 나서기로 했다. 누군가 열어본다면 우리의 억울한 상황을 이해해 주길 바랄 수밖에.

길을 걷다 가장 먼저 만난 건, 루터의 떡갈나무였다. 마틴 루터가 이 나무 아래에서 교황청의 파문장을 불태웠다고 한다. 800년 된 나무치곤 생각보다 젊어 보여 의아했는데, 안내문을 보니 이후에 새로 심은 나무라고 했다. 당시 유럽을 흔든 사건의 자리에 새로 심긴 나무. 시간이란 건 결코 멈추지 않고 흘러만 가지만, 사람들은 그 시간의 의미를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사건의 정신을 잃고 싶지 않은 간절함으로. 그렇게 젊은 떡갈나무는 조용하고 성실하게 그날의 메시지를 붙잡아 두는 일을 하고 있었다.


떡갈나무를 지나 천천히 걸었다. 성교회(Schlosskirche)까지 걷다 보면 뷔텐베르크의 볼거리를 대부분 지나갈 수 있다.

"이야! 너무 이쁘다!"
내 바지 색깔처럼 노란 잎사귀를 늘어뜨린 거대한 버드나무가 보였다. 버드나무는 졸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작은 시냇물 곁에 서 있었다.

"이런 거 좋아. 너무 좋아!"
나는 그 어떤 유적지보다 독일의 잘 가꿔진 동네 공원을 볼 때 가장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동화 같은 크리스마스 마켓

여행의 묘미 중 하나는, 낯선 거리를 걷는 동안 잊고 지냈던 감각들이 하나둘 깨어나는 일인 것 같다.

뷔텐베르크 시내의 골목은 아기자기한 독일을 보여주었다. 평일 낮이라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거리에는 따뜻한 손길들이 곳곳에 늘어져 있었다. 창가마다 정성스레 놓인 화분들, 그 속에 피어난 겨울꽃들, 돌길을 따라 물이 흐르는 작은 수로, 벽면의 벽화, 그리고 크리스마스를 준비하는 가게들의 아기자기한 장식들까지. 쓸모만 따지는 세상에서 숨어있던, 그저 예쁘기만 한 것들에 대한 사랑이 다시 샘솟는 것 같았다.

마틴 루터 동상이 서 있는 광장에 도착하자, 크리스마스 마켓이 펼쳐졌다. 여정 중 처음 만난 크리스마스 마켓이었다. 프랑크푸르트도, 라이프치히도 아직은 준비만 하고 있었는데, 드디어 문을 연 크리스마스 마켓을 만난 것이다. 귀엽게 꾸민 나무 부스마다 각종 먹거리와 아기 자기한 수공예품을 팔고 있었다. 현지인들이 글뤼바인(따뜻한 레드와인)을 한잔씩 손에 들고 담소를 나누는 모습이 정겨웠다.

마켓 한편에는 제법 커다란 관람차가 돌아가고 있었다. 처음 만난 크리스마스 마켓에 신이 난 우리는 서둘러 관람차에 올랐다. 위에서 내려다본 마켓의 풍경은,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알록달록한 불빛과 금빛 리본으로 장식된 커다란 트리, 삼삼오오 모여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활기를 더했다.

관람차 위에서 한국으로 화상전화를 걸었다. 8시간의 시차로 한국은 저녁이었다. 전화를 받은 막내가 화면 안에서 소리쳤다.
“엄마! 우와, 너무 예쁘다!”
남편과 아이 둘을 한국에 두고 떠난 여행이라 마음 한편이 늘 아삼삼했다. 고마우면서 미안한 그런 감정들.

“다음에 나도 데려가줘! 약속!”
막내에게 약속 도장을 다섯 번쯤 찍고, 화면으로 뽀뽀를 열 번쯤 받고 나서야 전화를 끊었다. 조금씩 지쳐가는 여정 속에서 그날의 관람차는 우리의 감정을 다시 들어 올려주는 리프트 같았다.


성교회(Schlosskirche)

관람차에서 내려 마켓을 빠져나오는데, 머리가 허전했다. 손으로 머리를 더듬어 보니 모자가 없었다. 다섯 해가 넘게 겨울마다 함께했던, 내가 직접 뜬 모자. 애정이 특별한 겨울 모자였는데 어디서 흘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엄마 모자 아까부터 없었는데?”
아이가 말했다. 사진을 돌려 보니 버드나무 공원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 마지막으로 모자를 쓰고 있었다. 지금 찾으러 가면 이후 일정이 다 엉킬 터였다. 안타까웠지만 돌아가는 길에 공원에 들러 찾아보기로 하고 우리는 성교회(Schlosskirche)를 향해 걸었다.

교회 입구는 조금 낯설었다. 리셉션이 있었고, 관람료를 받았다. 아마도 전시관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았다.

철커덕.

예배당에 다가가자 앞에 있는 큰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깜짝 놀랐다. 마치 다른 세계로 향하는 문이 열리는 것 같았다. 교회 내부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교회들보다 더 거룩한 기운이 감도는 느낌이었다.

상아색 바탕의 내부, 정교한 스테인글라스, 천창과 벽면에 그려진 정교한 그림들. 모든 것이 세밀한 톱니바퀴까지 하나하나 맞춰 돌아가는 시계처럼 조화로웠다.

예배당을 방문할 때마다, 한편으론 지나치다고 생각될 정도로 섬세한 이런 작업의 힘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건지 궁금했다. 신을 향한 믿음인지, 구원에 대한 갈망인지, 장인으로서의 자부심인지. 아마 그 셋의 조합이겠지.

나만 알아차릴 법한 미세한 실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그 정신을 닮고 싶었다. 아무도 모를 손톱만 한 흠도 살피고 또 살폈을 예술가의 손길을 바라보며 나는 삶도, 글도 작품처럼 진심을 다해 기도하듯 대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돌아온 모자

"이 교회 진짜 예뻤어. 그지?"
"응. 지금까지 본 교회 중에 제일 멋진데? 단순히 예쁜 게 아니라, 뭔가 기운이 있는 것 같아."
"맞아. 나도 느꼈어."

교회를 나오며 서로 같은 마음을 이야기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까지고 뷔텐베르크의 성교회는 가장 아름다웠던 교회로 기억되고 있다.

점심을 위해 들른 작은 쇼핑몰에서 우리는 젤라토를 사 먹었다.
“엄마, 저 아저씨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정말 친절하고!”
가게를 나서며 아이가 호들갑을 떨었다. 가게 주인은 서툰 영어에도 불구하고 다정하게 응대해 주며 즐거운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독일 사람들은 대체로 아이에게 다정했다. 그래서인지 어딜 가도 아이들이 많이 보였다. 아이를 향한 잠깐의 따뜻한 시선과 말 한마디가 여행자인 우리에겐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되었다.


다시 역으로 걸어가며 '제발.'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버드나무 공원에 들렀다. 그리고 낙엽 위에 놓여 있는 모자를 발견했다.

"아싸! 내 모자 저기 있다!"
나는 얼른 모자에게 뛰어갔다. 모자는 바람에 날리지도, 먼지에 더럽혀 지지도 않은 채 마치 주인을 기다리는 착한 강아지처럼 얌전히 그곳에 있었다.

"아이고 착해라."
모자를 집어 들고 가슴에 안았다. 아이는 그런 나를 보고 한참을 웃었다.

역으로 돌아와 보니 다행히 캐리어도 고장 난 락커 안에 무사히 있었다. 한국처럼 독일 사람들도 남의 물건에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기적처럼 무사한 하루

베를린으로 향하는 기차가 출발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눈을 감았다.

“이거 누가 버린 거 아니야?”

나의 모자를 피해 걸었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5년이나 쓴 내 모자는 사실 그리 탐나게 생기지 않았으니까.

“어이쿠, 이 사람들 영 안 됐구만. 돈 되는 건 하나도 없고, 자기 나라 음식만 가득이야.”

혹시 누가 캐리어를 가져가 열어 보았다가, 고국의 음식만 가득한 게 불쌍해서 다시 가져다 놓은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상상을 했다. 혼자 속으로 킥킥킥 웃다가 문득, 모자도 캐리어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던 게 그날 만난 엄청난 행운이란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모든 게 무사한 하루였다. 그 하루에 만난 수도 없이 많은 사건들 중 어느 하나에도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았다. 때때로 덜그럭거렸지만, 넘길 수 있는 수준의 일이었다. 한국에 있는 가족 셋도, 이곳에 있는 우리 둘도, 멀리까지 말하자면 하루를 무사히 살아냈을 지구 위의 많은 친구들까지.

하루가 무사하지 않았던 이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았을지...

무사한 하루, 그게 얼마나 큰 기적인지. 순간적으로 강하게 다가온 깨달음에 팔다리에 오소록 하게 소름이 돋았다.


아이를 바라보았다. 캐리어를 지키겠다고 짐 곁에 앉아 웹소설을 읽고 있는 아이가 부쩍 자란 듯 보였다.

'네가 열다섯이 되도록, 내가 서른아홉이 되도록, 얼마나 많은 기적이 우리를 스쳐갔을까. 얼마나 많은 좋은 인연이 우리를 키워 주었을까.'

셀 수도 없을 일이었다.

원망 속에서 헤매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아픈 기억은 지금도 때때로 나를 덮쳐 힘들게 했다.

'그럴 만도 했지. 그런데 그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기적이었네. 쥘 수 없이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쉴 새 없이 기적이 흘러오고, 흘러가고. 그렇게 살아왔네.'

차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시골 마을에 하나둘 불이 켜지고 있었다. 구석구석 기적이 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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