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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발 끝

브란덴부르크 문,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포의 토폴로지, 체크포인트 찰리

by 주혜나

베를린_1 역사 투어


“으합! 합! 흡!”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 3층까지 무거운 캐리어를 들어 옮기는 모녀의 기합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전날 저녁 여섯 시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베를린의 밤거리를 한참 걸어 도착한 숙소. 5박 6일을 보낼 이곳은 그동안 머물렀던 숙소들과는 사뭇 달랐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처음으로 현지인이 사는 집의 방 한 칸을 빌린 것이다. 현지인의 삶에 살짝 발을 담가 보고 싶다는 마음에서였지만, 엘리베이터가 없을 거란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힘겹게 도착한 집 안에는 덩치 큰 독일인 호스트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은 널찍하고 감각적이었다. 오래된 원목 마루가 발밑에서 삐걱거렸지만 오히려 정겹게 느껴졌다. 침대는 푹신했고, 침구도 깔끔했다. 에어비앤비 후기를 꼼꼼히 읽어 본 보람이 있었다.


라이히 스타크, 브란덴부르크 문

아침에 눈을 뜨자 거리는 촉촉히 젖어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니, 베를린 현지인들의 주거 공간 한가운데 들어와 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방문할 곳이 많은 하루가 기대되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비가 그치고, 어느새 파란 하늘이 드러났다. 첫 번째 목적지는 독일 연방의회 의사당, ‘라이히스타크’였다.

회색빛 석조 건물 위로 독일 국기가 바람을 타며 나부꼈다. 아이는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다 햇빛에 눈을 찡그렸다. 사진을 찍자고 하자 한 손은 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론 햇빛을 가리고 섰다. 아이의 몸짓은 언제나 말보다 솔직했다. 낯선 도시에 대한 반쯤 열린 마음이 사진 속에 그대로 보이는 것 같았다.

라이히스타크에서 조금만 걸어가니 브란덴부르크 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는 길에 체험학습을 나온 듯한 독일 학생 무리가 곳곳에 보였다. 세계사 교과서에서 자주 보았던 거대한 문. 수많은 역사적 장면의 배경이 되었던 그 문이, 아스팔트 도로와 신호등 같은 현대적 풍경과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묘하게 낯설고 신기했다. 사람들은 그 앞에서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우리도 그들 사이에 섞여 잠시 그 풍경 속에 머물렀다.

'라이히스타크'는 독일 제국 시절, 국가의회의 회의장으로 사용되기 위해 지어졌다가 2차 세계대전 때 심하게 훼손된 후, 방치되었다. 1990년 이곳에서 독일 통일 기념 서명을 하고 리모델링을 한 후 1999년부터 연방의회의 회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브란덴부르크 문'은 18세기말에 세워진 베를린의 대표적인 고전주의 양식 건축물이다. 냉전 시기에는 베를린 장벽 옆에 위치해 동서독 분단의 상징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일과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문 위에는 승리의 여신이 네 마리 말이 끄는 전차를 몰고 있는 조각상이 놓여 있다.
두 가지 건축물 다 독일 제국 → 바이마르 공화국 → 나치 독일 → 분단 독일 →통일 독일에 이르기까지, 독일 현대사의 흐름을 모두 품고 있는 역사적 장소이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브란덴부르크 문을 지나 우리는 가장 가보고 싶었던 장소로 향했다.

2005년, 유대인 학살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로 세워진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2,711개의 회색 콘크리트 기둥(스텔레)이 정돈된 듯 어지럽게 서 있는 공간이다. 조금 더 걸어가자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와 함께 그 안으로 들어섰다.

사진으로는 여러 번 보았지만, 실제 그 안에 발을 딛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었다. 기둥의 높이도, 바닥의 높낮이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시야는 점점 좁아지고, 공간은 어두워지며, 자연스럽게 발걸음이 조심스러워졌다. 기둥들 사이로 좁게 드러난 파란 하늘은 아득하고 멀게 느껴졌다.

그 속을 걷다 보니, 당시 유대인들이 느꼈을 불안과 혼란이 조금이나마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실제 그들이 겪은 감정은 이보다 백만 배는 더 깊고 고통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홀로코스트 메모리얼의 지하에는 유대인 희생자 기념관이 있었다. 우리는 잠시 조용히 줄을 서서 기다린 뒤, 천천히 그 안으로 들어갔다.

그 일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다시 일어날 수 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프리모 레비-
It happened, therefore it can happen again: this is the core of what we have to say.

입구에 적힌 프리모 레비의 문장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시관은 당시의 참상을 담은 사진들로 시작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걸린 사진 앞에 서서, 음성 안내기를 통해 그 시대의 실상을 듣고 있었다. 모두의 표정은 하나같이 비통했다.

기념관의 전시는 차분하고 냉정했다. 어떠한 미화도, 감정적 과장도 없었다. 누구에게 책임이 있었는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일이 벌어졌는지, 실명과 지명이 정확히 언급되었다. 당시 유럽 전역에 세워진 수용소들의 위치를 표시한 지도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곳의 전시는 설명이라기보다는 증언에 가까웠다. 기록된 사실 하나하나가, 누군가의 삶이었다. 지금까지 밝혀진 희생자들의 이름, 사진, 수용소로 끌려오기 전의 일상, 도망치다 잡힌 가족들의 사연, 끝내 탈출하지 못한 어린이의 마지막 편지, 그리고 유품들까지. 전시물 너머로 억울하게 생을 마감한 한 사람, 한 사람의 숨결이 느껴졌다.

이곳은 단순한 역사 교육의 공간이 아니라, ‘기억’의 장소였다


포츠다머 플라츠

유대인 희생자 기념관을 나와 도심 쪽으로 걸었다. 고요한 침묵에서 빠져나오자, 거리는 다시 활기를 띠었다. 포츠다머 플라츠까지 걸어오니 베를린 장벽의 조각이 서 있었다. 이 나라를 둘로 나눴던 콘크리트 장벽이 아직도 도시 중심에 그대로 서 있다는 게, 현실 같지 않을 만큼 낯설고 이상했다. 여전히 벽 위에 남겨진 총알 자국들, 그리고 그 위를 덮은 낙서들. 흐릿하게 남은 구호들은 단순한 벽이 아니라, 분단과 자유, 억압과 저항의 시간을 그대로 품고 있는 것 같았다.

바닥을 가만히 내려다보니, 과거 장벽이 있던 자리를 따라 끝없이 이어지는 선이 남겨져 있었다. 지나간 역사임에도 불구하고, 잊지 않으려는 기억의 의지가 도시 곳곳에 단단하게 배어 있었다.

포츠다머 플라츠에 위치한 파노라마 풍그트 전망대에 올랐다. 이 전망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는 유럽에서 가장 빠르다고 하는데, 단 20초 만에 지상 100미터까지 올라간다. 전망대 안의 커피숍에서 간단한 점심을 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베를린의 전경은, 이 도시의 역사와 아픔, 갈등마저도 멀리서 보니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다.


공포의 토폴로지

점심을 마치고 나오니 어느새 오후 2시를 훌쩍 넘겼다. 5시도 되기 전에 어둠이 내려앉는 베를린은 벌써 바람이 서늘해지고 있었다. 우리는 서둘러 걸음을 재촉해 ‘공포의 토폴로지(Topographie des Terrors)’ 전시관에 도착했다.

베를린 장벽의 잔해를 따라 걷다 보니, 전시관 입구가 보였다. 투박한 콘크리트 더미와 뒤엉킨 철근이 폐허처럼 쌓여 있었고, 그 위에 세워진 유리 구조물은 의외로 조화로웠다. 마치 과거의 상흔 위에 진실을 투명하게 덧씌운 것 같아 보였다.

전시는 놀라울 만큼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라, 피해자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부터, 명령을 내린 행정 조직, 무관심하거나 침묵했던 주변인들까지 빠짐없이 다루고 있었다. 흑백 사진과 공식 문서, 육성으로 남겨진 증언들은 오히려 정적 속에서 더 큰 울림을 전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건, 이 공간을 깔끔하게 정비하거나 새롭게 단장하지 않고, 오히려 파괴된 건물의 기초와 잔해를 그대로 보존해 두었다는 사실이었다. 한때 세계를 지배하려 했던 게슈타포 본부와 SS 중앙사령부가 있었던 바로 그 자리에, 이제는 기억과 반성의 전시장이 들어서 있었다.

돌아가는 길, 전시관 유리벽에 비친 석양이 어쩐지 더 붉고 깊게 느껴졌다.


체크포인트 찰리

우리는 다시 걸었다. 해 질 녘의 베를린 거리는 또 다른 낭만을 품고 있었다. 하나둘 불이 켜지기 시작한 와인바, 추운 날씨에도 야외 테이블에서 맥주를 마시는 사람들, 그리고 만화처럼 화려한 색감의 티셔츠들이 가득 걸린 기념품 가게들. 두리번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체크포인트 찰리’에 다다랐다.

체크포인트 찰리는 냉전시대, 서베를린의 미군과 동베를린의 소련군이 맞섰던 대표적인 검문소다. 지금은 그 시절을 기억하기 위해 작은 검문소 모형이 재현되어 있고, 그 위로는 한 장의 커다란 사진이 걸려 있었다. 동쪽에서 바라보면 미군 병사의 얼굴이, 서쪽에서는 소련 병사의 얼굴이 보이도록 설치된 것이다. 냉전이라는 시대를 관통했던 이념의 긴장감이, 여전히 그 장소를 지키고 있는 듯한 풍경이었다.

바로 그 옆에 ‘마우어 박물관(Mauermuseum)’이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좁은 통로와 빼곡히 들어찬 전시물들이 방문객을 맞이했다. 내부에는 장벽을 넘기 위해 사용된 수많은 탈출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개조된 소형 자동차, 숨겨진 여행 가방, 비행기형 패러글라이더, 그리고 땅을 파기 위한 도구들까지. 모두 실제로 사용되었던, 간절했던 시도의 흔적들이었다. 특히 작은 손가방 안에 온몸을 구겨 넣은 어린이 모형을 보았을 땐, 마음이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진 속에 있는 사람들의 얼굴은 특별하지 않았다. 그저 살고 싶었던, 살아야만 했던 평범한 이들의 간절한 표정이었다. 불과 1미터 남짓한 장벽으로 자유의 유무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그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박물관을 나와 다시 거리로 나오자, 모형 검문소 앞에는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 젊은 병사의 얼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저 젊은이들이 지키고 싶었던 건 과연 어떤 이념이었을까. 아니면 그저 사랑하는 가족이었을까.’

여전히 분단된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이곳이 단지 과거의 유적처럼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상처를 마주할 수 있는 이런 기념장소가 생기기를. 그런 날이 오기를 마음속 깊이 바랐다.


기억의 방향

숙소로 돌아오기 전, 우리는 독일의 한 중학교에 들렀다. 전날 밤, 숙소 호스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현지 학교를 한 번 방문해보고 싶다고 말했더니, 마침 그날 호스트의 둘째 딸 학교에서 토론 대회가 열린다며 우리를 초대해 주었다. 두 팀씩 맞붙어 주어진 주제로 토론을 벌이는 학생들의 모습은 한국의 중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강당 안은 또래 아이들의 활기와 수줍음으로 가득했다.

숙소로 돌아와 다리를 주무르며 하루를 되짚었다. 독일의 귀한 겨울 햇살을 받으며, 우리는 이 도시의 과거와 오늘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함께 만난 하루를 보냈다.

Those who can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기억하지 않는 자, 다시 그 일을 겪게 되리라. -조지 산타야나

유대인 희생자 기념관에서 사 온 엽서에 적힌 문구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독일, 그중에서도 베를린에 꼭 와보고 싶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과거의 잘못을 기록하고, 잊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나라. 외면하지 않고, 끝까지 기억하려는 태도.

하루 종일, 이웃한 섬나라와 우리의 분단 현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여전히 과거를 제대로 보려 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숨기고 미화하는 데 급급한 일본 정부. 아직도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살아가는 북한 주민들. 억울함을 가슴에 묻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이 세계에서, 우리는 아이들에게 어떤 사회를 꿈꾸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사는 오늘이 평안하다고 해서, 내 앞만 보고 살아서는 안 될 일이었다.

“엄마, 이런 공간을 만들었다는 게… 진짜 대단하다. 이렇게 기록하고, 전시하고. 꼭 기억하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아."

낮에 유대인 희생자 기념관에서 아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엇을,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

그리고 그 기억으로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기억은 바람처럼 눈에 보이지 않지만, 걷는 이의 발끝을 따라 방향을 바꾼다.

바람은 방향에 따라 돛을 밀어주기도 하고, 배를 뒤집기도 한다.


그날 밤, 우리는 우리가 향해야 할 발끝의 방향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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