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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자처럼 살려면

테우펠스버그

by 주혜나

베를린_2 테우펠스버그


"늦었다! 얼른 일어나!"

오전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늦잠이다. 독일 도착 9일 만에 우리는 시차에 완벽히 적응해 버렸다.

대충 만든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고, 서둘러 버스에 올랐다. 오늘의 목적지는 테우펠스베르크(Teufelsberg). 베를린에 도착한 첫날 호스트가 특별한 베를린을 보고 싶다면 꼭 가보라고 추천해 준 곳이었다. 베를린 외곽에 위치하고 있어서 버스를 몇 번 갈아타고 한참을 가야 했다.


위기탈출 피자집

버스를 타고 가다가 슬슬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기 시작했다. 아랫배가 살살 아파왔기 때문이다.

독일 여행 내내 신경이 쓰이는 문제가 두 가지 있었다. 바로 생수와 화장실.

한국에서는 별일 아닌 문제였지만, 이곳에선 늘 대비가 필요했다. 외출 전엔 생수를 가득 채워 챙기고, 화장실이 보이면 무조건 들러두는 게 기본이었다.
그 덕분에 지금까지는 별문제 없이 지나왔지만,
드디어 예상치 못한 돌발 상황이 찾아온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 나는 점점 더 절박해졌다. 처음 본 시골 동네 정류장은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공공 화장실을 찾을 수 없었다. 지하철역도 없었다. 빠른 판단을 내려야 했다. 길게 생각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한눈에 보아도 그곳에 제법 오래 있었을 것 같은, 현지인들이 즐겨 찾을 법한 조용한 식당이었다.

입구를 열고 들어서자 한켠에 수북히 쌓인 피자 박스가 보였고 작은 홀은 텅 비어 있었다. 마음이 급한 나는 메뉴도 제대로 보지 않은 채 피자와 커피를 주문하고 화장실로 향했다. 아침은 먹은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칸뿐인 작은 화장실에서 나는 아슬아슬하게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절박함을 해결하고 나서야 비로소 식당의 실내를 찬찬히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투박한 나무 테이블 몇 개, 화려하지 않은 메뉴 탓에 썰렁한 메뉴판이 그곳을 더 정감 있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바로 옆 주방에선 손으로 반죽을 던지고 받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 퍼졌다. 실내에 흐르는 컨트리풍 기타 연주 음악이 그곳과 잘 어울렸다.

커피가 먼저 나왔다. 어디서나 시키던 만만한 아메리카노였다. 큰 기대 없이 한 모금 먹은 후, 나는 눈을 감고 커피 향을 한번 더 크게 들이마셨다.

"오. 커피 맛있다!"

라테를 한 모금 마신 아이가 나보다 먼저 말했다. 독일에서 매일 마신 커피 중, 단연 가장 맛있는 커피였다. 슬슬 피자 맛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조금 뒤, 피자가 나왔다. 얇은 반죽 위에 올려진 것은 약간의 토마토소스, 피자치즈, 살라미 몇 조각, 그리고 작은 고추 몇 개가 전부였다. 단순한 토핑에 조금 당황했지만 일단 한 입 베어 물었다. 그 순간, 입 안에 들어온 피자의 맛은 내가 좀 전까지 머릿속에 그렸던 화려한 토핑들을 가뿐히 비웃는 것 같았다. 몇 가지 안 되는 재료가 조화를 이룬 맛은 놀라울 정도였다. 반죽의 바삭함과 쫄깃함, 가장자리의 고소함, 치즈의 구운 정도, 매운 고추와 살라미의 적적한 자극까지. 모든 것이 완벽한 비율로 얽혀 있었다. 무엇 하나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았다.

"이야. 이 피자 진짜 맛있지?"

내 말에 아이도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우리는 마지막 한 조각까지 야무지게 나눠먹었다. 좀 더 먹고 싶었지만 이미 배가 불러 못내 아쉬웠다.

Rafih
teufelsseestraße, 14055 Berlin, 독일


테우펠스베르크(Teufelsberg)

피자 집에서 나와 우린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테우펠스베르크.

이름도 어려운 이곳은 작은 산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 본격적으로 산길에 접어들자 주변엔 오직 나무와 풀만 가득했다.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좋았다. 하지만 인적이 없는 산길을 둘만 걷자니 조금 무서운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걸었다. 혹여나 무슨 일이 나면 전화를 걸려고 한 손에 핸드폰을 꼭 쥐고 있었다. 구글지도에선 30분 정도만 걸으면 된다고 했는데 실제 걷는 길은 예상보다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그러다 갑자기 머리 위에서 사람 목소리가 나더니 하늘에서부터 낙하산이 내려와 우리 앞에 착륙했다.

"으악!!"

너무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주저앉았다. 정신을 가다듬고 보니 패러글라이딩을 하고 내려온 사람이 저 앞에서 낙하산을 정리하고 있었다. 어찌나 놀랐던지. 심장이 가슴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도대체 여기 어디에 관광지가 있단 말이냐.'

똑같은 혼잣말을 열댓 번쯤 반복하며 좀 더 걷다 보니 앞에 조그만 매표소가 보였다. 서둘러 걸어간 매표소 뒤로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낡은 건물들이 어지럽게 서 있었다. 조심스레 표를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높이 솟은 거대한 흰색 돔이었다. 그 아래, 형형색색의 그라피티로 덮인 폐허의 건물들이 서 있었다. 빛바랜 시멘트 위에 덧칠된 색들은 마치 상처 위에 붙인 밴드처럼 이곳의 과거를 가리면서 동시에 드러내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전시실을 찬찬히 둘러보다 보니 우리가 방금 걸어온 산이 단순한 언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테우펠스버그(Teufelsberg)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군사학교가 있던 자리를 연합군이 폐허로 만들었고, 그 위에 전쟁 잔해를 쌓아 세계 최대 규모의 인공 산을 만들었다. 종전 후, 냉전 시기에 이 산 위에 미군의 감청기지를 세웠으나 냉전이 끝나자 더 이상 필요를 잃어버린 건물은 버려진 채 침묵 속에 방치되었다. 그러다 2000년대 초부터 예술가들과 도시 탐험가들이 다시 발을 들이기 시작했고 2010년대 초, 그라피티 아티스트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었다. 2012년 무렵, 전 세계의 유명한 그라피티 작가들이 이곳에 작품을 남기기 시작하면서 이 폐허는 예술과 기억이 공존하는 하나의 거대한 캔버스로 거듭났다.

건물의 구석구석, 거의 모든 벽면이 그라피티로 가득했다. 평화의 상징, 저항의 문구, 사랑을 외치는 형상들… 벽들은 하나같이 자신만의 메시지를 말하고 있었다. 마치 과거의 감시와 침묵을 덧칠하듯, 새로운 이야기 하나하나가 폐허의 벽 위에 그려져 있었다.

전쟁과 노동, 감시와 버려짐. 그 모든 시대의 잔해 위에 새로운 이야기를 덧칠한 사람들. 감추고 싶었을 아픈 기억 속에서, 기어이 새로운 생명을 틔워낸 이들의 조용한 외침이 들려오는 듯했다.

상처 위에 예술을 세운 테우펠스베르크.

베를린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그곳에서 조용하지만 강렬하게 자유의 소중함을 말하고 있었다.


딱 좋은 하루

해가 질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좀 더 머물고 싶었지만 내려가야 했다. 긴 산길을 내려가기 전 우린 작은 음료가게에 들렀다. 아이에게는 애플주스를, 나는 조그만 병의 화이트 와인을 주문했다. 처음 먹는 독일의 화이트와인이 예상보다 훨씬 괜찮았다. 입안에 퍼지는 적당한 달콤함과 목을 타고 넘는 탄산에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추운 날씨 탓이었을까, 혼을 빼놓는 그래비티들 때문이었을까. 작은 와인 한 병에 그만 살짝 취하고 말았다. 산길을 내려오며 나는 혼자 덩실덩실 엉덩이 춤을 추었다. 맨 정신일 때도 자연 속이라면 어디든 좋아하는데 취기가 살짝 오르니 그냥 그 숲이 너무 좋았다. 아이는 뒤에서 그런 내 모습을 동영상에 담았다.

"아. 내려가기 싫다. 여기 너무 좋아!"

"빨리 와. 이러다가 해 진단 말이야!"

계속 알딸딸한 상태로 숲에서 춤을 추며 걷는 내 손을 아이가 잡아끌었다.

그 순간이 즐거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 다니며 자연스레 만들어졌을, 빽빽한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을 걷는 일. 딱 요만큼의 와인으로 적당히 오른 취기. 늘 내 손만 붙잡고 걷던 아이가, 이번엔 내 손을 잡아끌고 앞서가는 일.

그 모든 사실이 괜히 다 좋았다.

산길을 따라 내려오며 서서히 정신이 돌아왔고,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는 산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마을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작은 공공도서관 박스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공중전화박스만 한 크기의 투명한 상자 안에는 책들이 빼곡히 꽂혀 있었다. 노란 조명을 받아 은은히 빛나는 그 모습이 너무나 고즈넉해서 잠시 멈춰 서서 바라보게 되었다. 문득, 독일 사람들은 거리나 지하철, 버스에서도 스마트폰보다는 책을 읽거나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저 소박한 도서관 박스 하나가 테우펠스베르크를 오늘의 모습으로 만든 바탕이 아니었을까. 틈틈히 쌓인 독서의 시간들이 이 도시의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낸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 우리는 운 좋게 이층 버스의 맨 앞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앞과 옆이 모두 유리창으로 되어 있었다. 조용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주택가를 지나자 거리 곳곳에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마켓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베를린의 거리가 마치 수채화처럼 몽환적으로 변해갔다.


살다 보면 아주 가끔, 이렇게 적당히 딱 좋은 하루를 만난다.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마음 깊이 울림이 있는,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는 하루.


점심때 만난 피자가 생각났다.

그 피자가 지금의 맛을 갖추기까지, 얼마나 많은 토핑들이 도우 아래로 탁락했을까.

적당히 쫀쫀하고 짭짤한, 그런 딱 좋은 인생이 되기까지 나는 앞으로 무엇을 더 마음 밖으로 떨어뜨려야 할까.


유리창에 부딪히는 빗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창 너머, 흩어지는 불빛들 사이로 베를린의 야경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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