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라하 시내, 프라하 성
기차가 어둠을 밀어내듯 힘껏 달렸다.
어느새 창 밖에는 어스름하게 동이 트고 있었다. 드레스덴에서 프라하로 기차를 타고 가는 길, 선로를 따라 흐르는 강이 진록의 색을 서서히 드러냈다. 강 너머로 언젠가 화면 속 초원에서 보았던 스위스의 오두막집을 닮은 아기자기한 목조주택이 드문드문 늘어서 있었다. 누구를 위해 켜 놓은 불인 지, 집집마다 켜진 불빛들이 강물에 비쳐 그 경치를 한결 더 고상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 풍경이 어찌나 멋진지. 남은 하루를 위해 서둘러 잠에 빠져야 하는 걸 알면서도 차마 그러지 못하고 창밖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나중에서야 그곳이 독일의 작은 스위스, 작센스위스라는 지역임을 알게 되었다. 다시 독일에 간다면 꼭 한번 들려 며칠 머물러 보고 싶은 곳이다.
기차가 독일에서 체코로 국경을 넘어서자 풍경이 확 달라졌다. 한국에서 보이는 여느 구 도심과 비슷한 풍경이었다. 나는 그제야 창에서 눈을 떼고 조금 눈을 붙였다.
"야! 일어나! 다 왔어! 내려내려!"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역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속에서 어찌어찌 '프라하'라는 단어를 알아 들었다.
'오메. 여기서 내려야 되나벼.'
나는 오는 내내 자느라 정신을 못 차리는 딸을 서둘러 깨우고 짐을 챙겨 아슬아슬하게 기차에서 내렸다.
그런데 내리고 보니 프라하에 도착을 하긴 했는데... 계획과 다르게 한 정거장 앞에서 내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제 밤늦게까지 짜 놓은 여행 계획이 초반부터 삐걱대기 시작했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아이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지고 입은 댓 발 나왔다. 제법 익숙해진 독일의 교통 시스템과 달리 체코의 시스템은 처음이었다. 예습을 하고 왔지만 헤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청승맞게 내리고 있었다. 기차역에서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가, 이쪽으로 갔다가 저쪽으로 갔다가...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헤매고 있는데, 아이는 아이대로 그 상황에 짜증을 내고 있었다.
'하하. 그래 두 번은 참아야지.'
나는 새어 나오는 콧김을 들이키며 속으로 말했다. 이게 왜 두 번째냐면.......
그날 아침 6시에 일어나라고 깨우는 내게 아이가 말했다.
"아. 엄마. 그냥 가지 말자."
순간 화가 났다. 독일에 온 후로 줄 곧 프라하를 갈지 말지 고민했고, 함께 내린 결정이었는데 당일날 아침에 이런 소리를 하다니....
'오케이. 일단 한번 참자.'
나는 곱게 아이를 깨워 기차에 태웠다.
이리저리 헤매긴 했지만, 마침내 트램을 탔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저녁에 뉘른베르크로 돌아갈 버스를 탈 장소였다. 이곳에 짐을 맡겨 놓고 본격적으로 프라하를 돌아볼 계획이었다. 당일 치기인 만큼 바쁘게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짐을 맡기고 돌아서자 아이는 배가 고프다며 역사에 있는 버거킹에서 아침을 먹자고 했다. 하루뿐인 체코여행이니 뭔가 좀 더 특별한 걸 먹었으면 했지만 아이는 버거킹을 고집했다.
그러고는... 맛이 없다고 햄버거를 남겼다.
'아.... 내가 세 번은 참는다. 휴.'
햄버거를 버리고, 열리기 직전인 뚜껑의 스팀을 살살 식히며 본격적인 여행을 위해 걸어가는데, 아이가 또 짜증 섞인 말투로 계속 내 말에 꼬투리를 잡았다.
"야! 너 정말!"
결국 나는 폭발하고 말았다.
"대체 니가 원하는 게 뭐야! 아침부터 계속 왜 이러는 거야!"
"내가 뭘! 엄마가 말하는 데로 다 했잖아!"
내 말에 아이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엄마는 예약하고, 길 찾고, 환전하고 모든 걸 다 하는데! 너는 니 기분 하나도 잘 간수를 못해!"
"나도 하려고 했잖아! 그런데 엄마가 아니라고 하잖아!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
그렇게 우리 모녀는 프라하 거리의 인도 위에서 한국말로 언성을 높여 싸우기 시작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사춘기 딸과 한 달간 단 둘이 매일 붙어있다니... 여행보다 얼마나 싸우게 될지가 더 걱정이었다. 지난 보름간은 별 일 없이 지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의 중반부에 들어선 그날, 결국 서로 참아왔던 게 터지고 말았던 것이다. 하필, 딱 하루 여행하는 그곳, 프라하에서.
우리는 한참을 길거리에 서서 언성을 높이고 서로를 째려보며 다투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메인 관광지가 아닌 외곽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참을 서로 다투다가 제대로 끝맺음을 하지 못한 채 다시 길을 걸었다. 친구였다면 아마 거기서 여행을 끝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우린 떼려야 뗄 수 없는 1촌 사이 아닌가.
앞서 걷는 나를 아이가 뒤에서 따라왔다. 엄마 말이라면 무서워서 지레 잘못했다고 말하곤 하던 어린아이가, 이제는 커서 한마디도 안 지고 같이 목청을 세우니 기가 차기도 하고 서럽기도 한 생각이 들었다.
너무 미운데, 동시에 또 너무 사랑하고 있었다. 1촌이 아니라면 느낄 수 없는 이 오묘한 감정 앞에 나는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필연적으로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화가 나서 막 소리를 지르던 친정 엄마에게 조곤조곤하게 내 할 말을 다 하던 십 대 시절의 내 모습.
'아이 씨.... 우리 엄마도 이런 마음이었겠네.'
그런 생각이 들자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왔다.
'몬땐 가시네. 지밖에 모르고.'
내 마음속에 오랫동안 박혀있던 가시 같은 말이 떠올랐다. 또박또박 내 할 말을 다 하는 내게 친정 엄마가 종종 했던 말이었다. 살아오는 동안 나는 그 말이 정말인 줄 알고, 내가 정말 '못된 가시네'인 줄 알고 두고두고 아파했었다.
그런데 그날, 아름답기로 유명한, 그래서 관광객으로 가득 찬 프라하의 거리 위에서 고개를 푹 떨구고 걸으며 나의 엄마가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했을지 처음으로 이해가 되었다. 저 못된 가시네를 얼마나 사랑하며 그 말을 했을지.... 엄마는 다만 사랑한다는 말은 뒤로 숨기고, 못됐다는 말만 앞에다 갖다 놓았던 것이었다.
그렇게 울며 걷다가 천문시계 앞에 멈춰 섰다. 넓은 광장에 관광객이 미어터지게 많았다. 천문시계에서 인형극을 하는 동안 한쪽 구석에 서서 아이에게 말을 했다.
"엄마는 너 사랑해. 미워서 그런 거 아니야. 많이 사랑해서 더 속상한 거야."
아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같이 큰소리를 치고 싸운 아이의 태도에는 여전히 화가 나 있었지만, 그 말은 꼭 해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녀석도 나처럼 엄마가 되기 전까진 내 마음을 모를 테니까. 오해를 안고 살기에 그때까지의 시간은 너무 길고, 아픔은 매번 날카롭다.
내 맘을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쳐다만 보았다. 쳐다보는 두 눈이 그렁그렁 맺힌 눈물에 반짝거렸다. 그런 녀석을 꼭 안아주었다.
다시 돌아 길을 걸으며 카를교까지 왔다. 우리는 천문시계, 구시청사, 화약탑, 마리아교회 같은 유명한 관광지들을 다 그냥 스쳐지나왔다.
카를교 아래 벤치에 잠시 앉았다. 한번 터진 내 눈물이 좀처럼 멈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남은 눈물을 다 쏟아내고 가야겠다 싶었다.
세 아이의 엄마로 살면서 내가 느끼는 부담감과 30대 초반 젊은 미망인이 되어 두 아이를 혼자 키워야 했던 친정 엄마의 부담감이 겹쳐지면서 친정 엄마를 원망한 날들이 너무 미안해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아이는 그런 내 곁에 조용히 앉아 있다가 가방에서 휴지를 꺼내 건네어주었다. 왜 우냐고 묻지도 않고, 그만 울라고 말리지도 않고, 그냥 묵묵히 있는 녀석의 행동이 위로가 되었다. 아이들이 어릴 땐, 왜 우냐며 따라 우는 통에 힘들어도 마음 놓고 울 수조차 없었다. 쟤 할 말 다 할 만큼 커버린 아이는 엄마에게 위로가 될 만큼 자라기도 했던 것이다.
한참을 울자 속이 시원해지고, 눈물이 그쳤다. 그제야 눈앞에 시커멓게 흐르는 블타바 강이 보였다. 벤치 옆으로 떨어진 갈색과 녹색, 노란색이 뒤섞인 낙엽들 위로 회색빛의 비둘기들이 연신 뭔가를 쪼아 먹으며 걸어 다녔다.
"다 울었다. 가자."
엉덩이를 툴툴 털고 일어섰다. 다시 아이와 나란히 걸었다.
까를교에 들어서자 저 멀리 그 유명한 프라하성이 보였다.
윤슬이 반짝이는 블타바강 위로 베이지색 벽과 주황색 지붕을 가진 건물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그 위에 초록 지붕의 웅장한 성채와 다른 세기에서 온 것 같은 바로크 양식의 거대한 비투스 대성당이 서 있었다. 흐린 날씨임에도 그 풍경이 어찌나 독특하고 아름다운지. 왜 다들 프라하, 프라하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언제 깔렸는지 알 수도 없을 돌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다 보니 비투스 대성당이 나왔다. 일반적인 성당 규모도 작지 않은데 대성당이라니.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에 일단 압도되었다. 내부로 들어가 볼까 했지만 입구에 늘어선 줄이 너무 길었다. 줄 서기를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우리 모녀는 재빨리 포기하고 뷰가 좋기로 유명한 스타벅스로 발걸음을 옮겼다.
비투스 성당을 지나 조금 더 걸어오자 넓은 광장이 나왔다. 넓은 광장을 중심으로 여러 건물들이 둘러 서 있었다. 알고 보니 프라하성은 단일 성이 아니라 성곽 도시였다. 전체를 제대로 둘러보려면 아침 일찍부터 하루는 꼬박 잡고 와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았던 우리는 전망대에서 커피와 풍경을 즐기다 가기로 했다.
"거기 서봐. 사진 찍어줄게."
전망대에 서서 아이에게 말했다. 여전히 다툼의 여운이 남아있던 둘 사이에 화해의 물꼬를 튼 것이다. 아이는 말없이 가장 전망이 좋은 자리에 가서 섰다. 카메라 속에 어색하게 서 있는 아이를 보니 사진만 찍으면 어김없이 이상한 포즈를 취하거나 눈을 감아버리던 녀석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어릴 적부터 잠 때문에 고생이 많았던 녀석은 늘 밤이면 잠을 자기 싫어 찡찡거리다 동이 트고서야 잠이 들어 한낮까지 자곤 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느라 많이 힘들었을 텐데.... 한번 더 참을 걸 그랬네.'
후회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한 번만 더 참았으면 하루뿐인 프라하 거리를 울면서 걷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지만 덕분에 내 마음속에 오래 남아있던 상처를 바라보게 되었으니 오히려 잘된 일인가 싶기도 했다.
"엄마가 화내서 미안해. 네가 아침에 일어날 때부터 가지 말자고 해서 좀 화가 났어. 그때부터 여러 번 참다가 폭발했는데, 너는 엄마가 갑자기 화내는 것 같았을 거야. 아무튼, 화내서 미안해."
프라하 시내가 내려다 보이는 스타벅스 야외 테이블에 앉아 아이에게 사과를 건넸다.
"......."
녀석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바람이 차가웠다. '너는 왜 미안하다고 안 해?'라고 말하고 싶은 치사한 마음이 울컥 올라왔다. 하지만 북한도 무서워한다는 중2, 열다섯의 너에게 미안하다는 말까지 바라는 건 내 욕심이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얼른 치사한 말을 꿀꺽 삼켰다.
성에서 내려오는 길, 아기자기한 소품 가게도 많고 골목들도 너무 예뻤다. 떠날 시간이 한 시간 남짓 남은 그제야 프라하시내가 제대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다행히 터미널로 가는 버스가 골목 구석구석을 돌며 운행하는 덕에 우느라 못 봤던 시내를 차창 밖으로 짧게나마 구경할 수 있었다.
저렴한 물가, 유려한 풍경, 그 외 것은 아직 잘 모르지만... 체코는 분명 한번 더 여행오기 좋은 국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이는 프라하에서 명품백을 자랑하듯 들고 다니는 한국 관광객을 너무 많이 보았다며 별로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너도 조만간 좋아하게 될걸?'이라고 말하려다 또 한 번 말을 꿀꺽 삼켰다.
터미널에 도착해 무사히 짐을 찾고 좌석에 앉았다. 해가 지는 시간이라 일부러 이층 가장 앞자리를 예약했다. 역시 예상했던 데로 붉은 노을빛에 물든 프라하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프라하를 떠나 고속도로를 달린 지 한 시간쯤, 카톡 알람이 울렸다. 한국 시간으로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었다. 단톡방에 들어가 보니 지금 당장 뉴스를 보라는 메시지가 올라오고 있었다. 얼른 뉴스를 보니 한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고 했다. 단톡방에서는 딥페이크를 이용한 가짜 뉴스다. 아니다. 난리가 났다가 결국 진짜라는 결론이 나왔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서둘러 전화를 걸었다. 다들 자느라 계엄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온갖 생각이 떠올랐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전쟁이 나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나라도 가족도 걱정이 되었지만, 제 코앞에 문제가 제일 큰 문제라고 나는 당장 여행 중에 전쟁이 나면 우린 어떻게 되는 건지, 아니 당장 몇 시간 후면 독일 입국 심사를 할 텐데 안 받아 주는 건 아닌지 하는 걱정들이 밀려왔다.
그렇게 버스에서 계속 뉴스를 보며 마음을 졸이기를 두 시간, 계엄이 해제되었다는 뉴스가 나오고 한국에서 안도의 전화가 걸려왔다. 천만다행이었다.
마음을 졸이던 두 시간 동안 아이와 나는 사회와 정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태어나 계엄을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두 세대가 계엄이 무엇인지, 지금 이 상황이 왜 말이 안 되는지, 나아가 민주주의가 현시대의 주류가 된 이유와 이상적인 사회주의가 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지에 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독일 국경에 다다르기 전에 계엄이 해제된 덕분에 우린 다시 무사히 독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밤 10시가 가까운 시간에 뉘른베르크 터미널에 내렸다. 하얀 시트가 덮인, 더블침대가 꼭 맞게 들어가는 작은 방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쓰러지듯 몸을 뉘었다. 참으로 길고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