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츠담_상수시궁전, 신궁전, 카이져빌헬름 기념교회
베를린_4
이불 밖으로 삐죽 나온 아이의 발바닥이 보였다.
새끼손가락만큼 작고, 찹쌀떡처럼 말랑말랑해서 매일 뽀뽀를 해 주던 작은 발바닥이 기억나 빙그레 웃음이 나왔다.
이내 아이의 발바닥을 살살 간지럽혔다. 아이는 잠결에 반사적으로 이불속으로 발을 숨겼다.
나는 다시 이불을 들추고 손톱 끝으로 발바닥을 살살 긁었다. 아이는 이불속에서 몸을 꿈틀거렸다.
“아, 알았어…. 일어날게.”
졸음이 잔뜩 묻은 목소리로 대답하던 아이는 몇 번 더 간지럼을 참고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향했다.
포츠담 당일치기 여행을 떠나는 날이었다. 포츠담 역에 도착한 우리는 상수시 궁전까지 걷기로 했다. 버스도 있었지만 걸으며 포츠담을 좀 더 구경하고 싶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상수시 궁전이 저 멀리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했던, 드라마 속에서 주인공의 배경으로 빛나던 그 노오란 궁전이었다. 하늘이 흐려서 화면만큼 자태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이미 설레고 있었다.
한 걸음씩 계단을 올라 궁전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데 빠라밤.... 멀리서 바라볼 땐 고운 노란빛이 꽤나 인상적이었는데, 가까이 다가설수록 조금씩 기대가 꺾였다. 외관이 예상보다 훨씬 낡아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이라 그런지 조각상들도 헝겊으로 둘둘 말아 놓아서 제대로 감상을 할 수가 없었다.
상수시궁전(Sanssouci Palace)은 독일 포츠담에 위치한,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가 1745년에 지은 여름 궁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상수시궁전은 비교적 큰 손상을 입지 않고 원형을 거의 그대로 보존했다. 현재 상수시궁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역사적 명소가 되었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별 기대 없이 궁전의 내부에 들어갈 시간을 기다렸다.
관람 시간이 다 되어 궁전 안으로 들어선 순간, 나는 입이 떡 벌어지고 말았다. 천장에는 하늘을 그린 프레스코화가 펼쳐져 있고, 핑크빛 소파가 놓인 응접실은 지금도 손님을 맞기에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각기 다른 테마로 꾸며진 여러 방들이 나왔다. 모든 방의 벽과 천장마다 화려한 조각들이 새겨져 있었다. 어떤 방은 커튼과 카펫도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우리에겐 낯선 독일의 과거가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런. 유럽 디테일 변태들.”
벽면 전체에 섬세한 꽃과 동물들이 조각되어 있는 작은 방에서 나는 무심코 혼자 읊조렸다.
아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야. 어떻게 이렇게 만들 수가 있냐? 사람이?”
내 속삭임에 아이도 고개를 끄덕였다. 복숭아꽃이 핀 가지로 장식된 거울 속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꽤나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상수시'는 프랑스어로 '걱정이 없다.'라는 뜻이에요. 이곳은 로코코 양식 건축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죠."
안내원의 설명을 다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그런 말인 것 같았다.
"이야. 로코코, 징그럽다. 이런 집에 살면 걱정이 없을까? 걱정이 없을 수가 없을 것 같은데?"
궁전을 나오며 내가 말했다. 아이는 또 내 옆구리를 쿡 치며 킥킥 웃었다.
상수시 궁전을 나와 점심을 먹으러 쌀국수 식당에 들어갔다. 구글 평점이 좋아 찾아간 곳이었지만, 메뉴판을 펼치자마자 조금 당황했다.
“2인 초밥롤 세트가 79유로래. 12만 원이야.”
“쌀국수 없어? 쌀국수 좀 찾아봐.”
메뉴를 고르는 척하며 서로 말했다. 이곳에선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묘하게 해방감을 주었다. 한참을 뒤져 겨우 주문한 쌀국수는 생전 처음 보는 초록색 비빔 쌀국수였다. 고수의 향기와 레몬의 시큼한 맛이 어우러진 낯선 조합이었다. 다행히 맛이 나쁘지 않았다. 퓨전 쌀국수 한 그릇과 커피 한 잔, 그리고 잠깐의 휴식 덕분에 우린 다시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신궁전 관람이 마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서둘러 버스를 타고 신궁전으로 향한 덕분에 마지막 회차 입장권을 살 수 있었다.
입장까지 잠깐 남은 시간 동안 기념품샾을 둘러보다가 원석을 파는 코너가 눈에 들어왔다. 돌멩이를 모으기 좋아하는 아홉 살 된 막내가 생각났다.
“엄마, 막내 생각났지? 하나 사가. 좋아하겠다.”
6살 차이 나는 막내를 항상 귀엽게 봐주는 듬직한 첫째였다. 나는 몇 개의 원석을 골라 곱게 가방에 넣었다.
신궁전(Neues Palais)은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가 1763년 7년 전쟁 직후에 지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뒤 국가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건설된 이 궁전은 상수시궁전보다 훨씬 크고 웅장하며, 공식적인 손님 접견과 연회, 숙소 용도로 사용되었다.
외관은 붉은 벽돌과 흰 대리석 기둥, 돔 지붕이 인상적이며, 내부는 화려한 로코코와 바로크 장식, 대리석 홀, 프레스코화, 금장 몰딩, 샹들리에로 꾸며져 있어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약 200여 개의 방과 여러 개의 연회장, 극장 등이 포함되어 있으며, 궁전 전체가 마치 한 편의 궁정 예술처럼 구성되어 있다.
비교적 자유롭게 둘러볼 수 있었던 상수시 궁전과 달리, 신궁전은 가이드와 동행하며 그룹으로 관람을 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 거대해서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방들은 모두 하나같이 호화로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었다. 어느 곳을 가도 부족한 부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문 손잡이 하나, 의자 다리 하나조차 평범한 것이 없었다.
“저기 보이는 건물이 과거엔 이 궁전의 부엌이었어요. 저기서 음식을 만들어 궁전으로 옮겨 식사를 했죠.”
안내원이 손으로 가리킨 건물은 현재 포츠담대학교로 사용되고 있는, 궁전 맞은편의 거대한 석조 건물이었다. 그 순간, 머릿속에 한 장면이 그려졌다.
화려한 옷을 차려입은 이들이, 화려란 음식이 놓인, 화려한 식탁 앞에 둘러앉아 있는 모습.
우리 가족의 식탁이 떠올랐다.
크지 않은 부엌에, 작은 식탁. 다섯 식구가 옹기종기 둘러앉아 따끈한 요리로 저녁을 먹으며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서로 이야기하는 시간. 그 시간 덕분에 우린 사회 속 각자의 자리에서 하루를 무사히 살고, 또 곤히 잠을 청하곤 했다.
보이지도 않는 천장 구석의 몰딩 하나까지도 완벽한 거대한 체스판 같은 연회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이 화려한 공간에서 왜 자꾸 쓸쓸함이 느껴지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궁전을 모두 둘러보고 밖으로 나왔을 땐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뒤였다.
기차를 기다리며 나는 난간에 기대앉았다. 코끝이 시리고, 다리가 욱신거렸다.
“다리 아파?”
아이가 물었다.
“응. 너는 안 아파?”
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내 옆 자리에 다가와 조용히 섰다. 살결이 닿지 않았는데도 따뜻했다. 저렴한 메뉴를 찾아 메뉴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우리였지만, 서로가 곁에 있어 마음이 풍족할 수 있었다.
기차에 앉아 쉬는 동안 다행히 기운이 돌아왔다. 베를린에서의 마지막 밤을 일찌감치 숙소에 돌아가 보내기는 아쉬웠다.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 차창 밖으로 서서히 '썩은 이빨'이 지나갔다. 우리는 눈을 맞추고는 서둘러 버스에서 내렸다.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
독일 베를린 중심부 쿠르퓌르스텐담(Kurfürstendamm)에 위치한 상징적인 교회이다. 원래는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를 기리기 위해 1890년대에 지어진 신로마네스크 양식의 화려한 교회였으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의 공습으로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이후 전쟁의 참상을 기억하기 위해 무너진 첨탑 일부를 그대로 보존하고, 그 옆에 현대식 건물을 더해 기념 교회로 재탄생했다. 이 파괴된 탑은 “썩은 이빨”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전쟁 반대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다.
첨탑 안으로 들어서자, 파괴되었던 자리를 복원한 흔적들이 흉터처럼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화려하거나 감추려 하지 않은, 솔직한 그 모습이 오히려 더 장엄하게 다가왔다.
첨탑 내부의 한쪽 벽엔 전쟁 전 온전한 교회의 모습과 폐허가 된 직후의 교회 모습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사진을 쭉 보다가 나는 한 사진 앞에서 멈춰 섰다.
무너진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 사진이었다.
삶이 모두 무너져 내린 폐허 속에서도 여전히 먹고, 자고, 일하고, 예배하며 하루하루를 이어가야 했을 살아남은 이들. 한국 역시 그런 시절을 견뎌내야 했던 이들이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매일을 살아낸 인간의 고단함과 위대함. 내게는 그 모습이, 낮에 보았던 궁전들의 말도 안 되는 화려함보다 훨씬 더 아름답게 다가왔다.
교회에서 나오자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교회가 베를린의 가장 큰 번화가인 쿠담거리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불과 80여 년 전, 이곳 모두가 폐허였다는 사실을 누가 상상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람들과 섞여 함께 걷다가 바클라바를 파는 작은 노점 앞에 멈춰 섰다. 달콤하고 고소한 터키 디저트 바클라바. 너무 맛있지만 잘못 사면 기름에 쩔은 역한 맛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노점 앞에 잠시 서서 망설였다. 그런 우리를 보고 노점 안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가 일어섰다. 털모자 아래로 희끗한 흰머리가 드러난 아담한 체구의 남미계 할아버지였다.
'이 바클라바 내가 만들었어. 진짜 맛있어. 믿고 먹어봐!'
우리가 관광객이란 걸 알았던지, 할아버지는 영어도 독일어도 아닌 몸과 미소로 우리에게 말을 건넸다. 신기하게도 우린 할아버지의 말을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바클라바를 사 들고 쿠담 거리를 걸었다. 한입 베어 물자 소탈하게 웃던 할아버지의 미소가 다시 떠오르는 것 같았다.
뒤를 돌아보았다.
쿠담 거리는 화려했고, 회복의 역사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