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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도 없이 사진 동아리에 들었다

100일 챌린지_Day 78

by 윤소희

카메라도 없고, 사진을 찍어본 적도 없는데, 무작정 사진 동아리에 들었다. 그 무모함은 결핍에서 나온 충동이었다. 상하이로 이사 온 뒤 발레를 그만두었고, 손가락 부상으로 바이올린을 놓았다. 함께 연주하던 밴드는 흩어졌고, 아이들과 매년 떠나던 한 달 여행도 이제 불가능해졌다. 삶의 리듬이 끊겼다. 나를 흥미롭게 바라보던 시선이 점점 말라갔다. 나는 ‘보는 법’을 다시 배워야 했다.


첫날부터 원정 출사였다. 초면의 사람들 사이에서 얼떨결에 차에 올랐다. 신석기의 흔적이 남은 넓은 유적지. 전시장과 연못, 전통 건축과 고풍 건물들이 어우러진 공간. 모두가 카메라를 들고 흩어졌지만, 나는 한참을 서 있었다. 찍을 게 없었다. 실은 찍을 게 없는 게 아니라, 볼 줄 몰랐다. 눈은 떴으나, 시선은 닫혀 있었다.


사진을 찍는 일은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일이다. 무엇을 찍을지 고르는 순간, 나는 나의 세계를 편집한다. 프레임을 정하는 일은 문장의 경계를 긋는 일과 닮았다. 세상 전체를 다 담을 수 없기에, 무엇을 잘라내고 무엇을 남길지 선택해야 한다. 그 선택이 곧 나를 드러낸다. 사진도, 글도 결국 사유의 프레이밍이다.


‘구도’라는 단어를 자주 들었다. 수평을 맞추고, 삼등분 법칙을 따르고, 피사체를 중심에 두지 말라 등등 질서의 언어가 쏟아졌다. 그런가 하면 진짜 작품은 그 틀을 깨야 나온다고도 했다. 나는 틀을 깨려 했지만, 내가 찍은 사진들은 그저 불안하고 어지럽기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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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틀을 깨려 했지만, 내가 찍은 사진들은 그저 불안하고 어지럽기만 했다


구도를 모른 채 자유를 외치면 혼돈이 되고, 구도를 알고 난 뒤의 자유만이 비로소 창조가 된다. 틀을 깨려면 먼저 틀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틀은 구속이 아니라, 자유를 위한 기반이다. 글도 마찬가지. 글의 구조나 문법의 틀을 모르고 마구 쓰면 글은 흩어진다. 질서를 체득한 뒤에야, 그 질서 너머의 문체를 얻을 수 있다.


결국 마음에 드는 사진은 건지지 못했다. 그저 무엇을 담고 싶고 담고 싶지 않은지, 그 어슴푸레한 감각만 남았다. 나는 웅장한 건축물이나 대자연보다, 누군가의 엎드린 등이나 벽의 흠집 같은 사소한 결에 끌렸다. 빛이 스며드는 작은 틈, 한순간 멈춘 시간의 그림자. 그 안에 이야기가 있었다.


붉은 나무 창살 격자 사이로 풍경을 찍다 엎드린 사람을 발견했다. 그는 얼굴을 창쪽으로 묻고 있었고, 등에는 긴 하루가 누워 있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창 사이로 흘러든 빛이 그의 등을 가만히 다독였다. ‘괜찮아, 잠시 쉬어도 돼’ 하는 속삭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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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잠시 쉬어도 돼’ 하는 속삭임처럼


사진으로 세상을 다시 볼 수 있을까. 보는 법을 배운다는 건, 결국 쓰는 법을 다시 배우는 일 아닐까. 빛과 그림자, 질서와 혼돈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세상을 보는 프레임을 만들어가고 있다.



IMG_5877.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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