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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페르시플라주를 하는가

100일 챌린지_Day 79

by 윤소희

어릴 적 나는 좋은 말의 풍경을 거의 배우지 못했다. 부모의 눈이라는 렌즈로 볼 때, 내가 잘한 일들은 당연하게 여겨졌고, 실수나 실패는 숨겨야 할 죄처럼 다가왔다. 그래서일까. 칭찬이나 사랑, 감사를 표현하는 말들은 늘 어색하고 낯설었다. 오히려 너무 심하지만 않다면, 조롱이나 농담이 편했다.


책에서 우연히 그 단어를 마주했다 — 페르시플라주(persiflage). 약간 고약하지만 심하지는 않은 조롱이나 농담. 겉으로는 유머와 위트를 가장하지만, 이면에는 타인을 비꼬거나 불안을 감추려는 마음이 숨어 있다. 독일의 사상가 아돌프 크니게는 험담이나 가십뿐 아니라 페르시플라주도 반드시 버려야 한다고 했다. ‘가볍게 웃자’는 말속에도 사람의 존엄은 쉽게 상처받는다.


IMG_5891.heic 아돌프 크니게 <우리가 타인을 마주할 때>


정말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데, 입 밖에 나오는 건 유머랍시고 던진 조롱과 야유.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말들은 늘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을 향했다. 대표적으로 남편. 달콤한 말을 건네고 싶어도, 정작 내 입에서 나오는 건 “숱이 또 줄었네”, “배가 풍선 같아” 같은 시큼한 말들이다. “오늘 당신이 한 작은 일들 덕분에 마음이 따뜻했어.”, “당신 덕분에 나는 조금 더 용감해졌어.” 같은 문장을 말로 꺼내려면 몸이 간지럽고 마음은 얼어붙는다. 어쩌면 나는 그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사랑하는 이에게 하지 못한 말을 담아 보낼 편지를 쓰기 위해.


하고 싶은 말은 늘 안에서 부러지거나 꺾였다. 부드러운 마음을 꺼냈다가 다칠까 봐, 나는 농담으로 위장한 언어를 방패처럼 들었다. 방어적 유머, 수동공격의 언어. 그러나 그 고약한 농담 속에는 언제나 인정받고 싶고,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었다. 그 모순된 언어 습관은 삭막한 내면의 지도를 그려냈고, 나는 글을 쓰며 그 지도를 다시 그려 나간다. 말과 달리, 글은 여러 번 고쳐 쓸 수 있어 얼룩진 표현을 걷어내고, 진심을 닦아내는 연습이 가능하다.


글을 쓰며 나는 어린 시절의 나를 다독인다. 솔직하게 꺼내도 괜찮다고, 이제 그만 숨지 말라고. 굳어 있던 마음의 언어를 다시 푸는 일은 쉽지 않지만, 글의 반복 속에서 나는 조금씩 유연해진다. 어린 시절의 방어막을 해체하고, 사랑과 감사를 표현하는 법을 새로 배우며, 마음이 머물 자리를 찾아간다.


아직 완전히 성공하지는 못했다. 여전히 사랑하는 이 앞에서 퉁명스러운 말이 먼저 튀어나오기도 한다. 변화는 아주 서서히 일어난다. 말로 꺼내기 힘든 이야기, 간지럽고 어색한 감정, 숨기고 싶던 마음들이 문장 속에서 제자리를 찾는다. 그렇게 마음에도 없는 조롱 대신, 부드럽고 따뜻한 언어가 입안에 머물기 시작한다.


언젠가,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문장 위에 마음을 올려놓는다.



Weixin Image_2025-10-02_165358_151.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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