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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슨하게 흘린 말 한마디가 누군가를 살린다

100일 챌린지_Day 80

by 윤소희

인스타그램 피드에 다급한 댓글이 달렸다.

작가님, 제발 DM 확인해 주세요.

짧은 문장 하나가 내 하루를 멈춰 세웠다. 숨이 찼다. 무언가 절실하고 간절한 사정이 있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메시지함을 열었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비어 있었다.


그때 문득 ‘스팸함’을 떠올렸다. 그곳에서 그의 메시지를 발견했다. 휴대폰이 초기화되어 계정을 잃었다는 말, 새 아이디로 급히 다시 찾아온 흔적, 그리고 마지막에 적힌 문장.

지금 쓰고 있는 책에, 작가님 만난 이야기를 써도 될까요?


그의 말은 조심스럽지만 단단했다.

제가 중1 때 도서관에서 작가님을 만났을 때를 잊을 수 없어요. 늘 ‘왜 나한테만 이런 일들이 생길까’라며 스스로를 미워했는데, 작가님 이야기에 큰 힘을 얻었어요. 제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고 안아주셨던 그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해요.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코끝이 시큰해 한참 동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날의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 풍경처럼 멀리 있었다. 가을이었지만 유독 더웠던 날,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던 작은 도서관, 조용히 다가온 소녀의 얼굴. 그날 내가 한 일이라곤 내 아픔을 조금 내보이며, ‘괜찮다’고 말한 것뿐이었다.


그렇게 느슨하게 흘린 말 한마디가 누군가의 인생에 닿기도 한다. 마치 가느다란 실이 공기 중을 떠다니다, 아주 멀리 있는 누군가의 손가락에 걸리는 것처럼. 나는 그의 곁을 스쳐갔지만, 그는 그 실을 붙들었다.


우리가 맺는 관계들은 치밀하지 않다. 대부분 우연하고, 불완전하며, 때로는 엉성하다. 그러나 그 느슨함이야말로 연결의 진짜 힘인지 모른다. 너무 단단히 묶인 끈은 쉽게 끊기지만, 느슨한 실은 바람을 따라 길게 뻗는다. 내가 쓰는 문장도 역시 느슨하다. 그 어떤 문장도 완벽하지 않다. 불완전하기에 숨 쉴 틈이 생기고, 그 틈으로 바람이 들어온다. 그 바람에 누군가는 숨을 쉴 수 있다.


그 소녀는 누구보다 아팠지만,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내가 건넨 말 한마디를 붙들고 글을 썼다. 이제 자신의 언어를 다른 누군가에게 건네려 한다. 상처가 나를 폐허로 남기지 않고, 통로로 만든다면 그 상처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는 둘 다 완전히 낫지는 않았지만, 불완전한 자리에서 누군가를 껴안을 수 있으니 치유는 이미 시작되었다.


그에게 답장을 보냈다. 그의 책 속에 등장할 수 있다면, 아주 기쁠 거라고. 언뜻 내가 그를 도운 것 같지만, 실은 그가 나를 구해 주었다. 허무 속에서 의미를 찾아 헤매던 내게, 그는 조용히 손을 내밀었다.


언제, 어디서, 누구의 마음에 닿을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느슨한 실 위로, 생명이 흐른다. 글을 쓴다는 건 그 느슨한 연결을 믿는 일이다. 내가 흘린 문장 한 줄이 언젠가 누군가의 마음에 걸려, 작은 불빛으로 남을 것임을 믿는 일.




WechatIMG8294.jpg 윤소희 작가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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