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90
팟캐스트 녹음을 위해 약속 장소로 향하던 봄날 오후. 거리의 공기는 한낮의 잔열을 품고 있었고,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다. 내 마음은 분주했다. 낯선 길, 다듬지 못한 생각들, 시간에 쫓기는 발걸음. 약속 장소인 건물을 찾고 한숨 돌리려는 순간, 한 청년이 불쑥 말을 걸었다.
난민에 관한 질문 하나만 해도 될까요?
그는 내게 옳다고 생각하는 답 하나를 골라 달라고 했다. 대부분은 이런 상황에서 “죄송합니다, 바빠서요.” 하며 지나간다. 나도 그러려 했다. 실제로 약속 시간이 임박했으니까. 그러나 청년의 눈빛이 나를 붙잡았다. 외면할 수 없는 절박함이 있었다.
답을 마친 뒤 떠나려는 나에게,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팔에 아주 작은 스티커 하나를 붙여도 되겠냐고. ‘그 정도야 뭐…’ 하며 허락하자, 청년의 얼굴이 환해졌다. 몇 시간을 거리에서 보냈는데, 스티커를 붙이게 해 준 사람은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그 말이 오래 남았다.
레비나스는 타자의 얼굴에 반응하는 것이 인간다움이라 했다. 나는 나의 길을 가고 있었지만, 그날 청년의 얼굴이 나를 멈춰 세웠다. 누군가의 절박한 얼굴, 또는 무구한 얼굴이 때로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 그 눈빛과 마주한 이상, 더 이상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그날 이후 매달 후원금을 보내는 단체가 또 하나 늘었다. 이미 여러 단체를 돕고 있었지만, 어떤 얼굴들은 도무지 외면할 수 없다.
아주 가까운 곳에도 절박한 얼굴이 있었다. 무한히 도울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삶은 언제나 선택을 요구한다. 결국 베이징의 한 단체 후원을 멈추기로 했다. 상하이로 이사 온 지 3년이 되어가지만, 그곳 아이들에게는 아직 미련이 남았다. 문자로 결정을 전하는데, 손끝이 떨렸다.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없이 많은 얼굴이 나를 부른다. 삶이란, 어떤 얼굴에 응답할지를 결정해야 하는 아프고도 불가피한 선택의 연속이다. 글을 쓸 때도 나는 같은 고민을 한다. 끝까지 품어야 할 문장과, 떠나보내야 할 문장 사이에서. 오래 붙든 문장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새로운 문장이 태어나기도 한다.
그날 거리에서 나는 스티커 하나를 붙인 것이 아니라, 스티커를 내민 그의 얼굴을 붙든 것이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결국, 타자의 얼굴을 잊지 않기 위한 발버둥이다. 그 눈빛을 기억하고, 또 배신하지 않기 위한.
*100일 챌린지 어느덧 90일이 되었네요. 브런치 북 3권은 마무리되지만, 4권에 이어서 남은 열흘 올리겠습니다. 100일 챌린지와 함께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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