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일 챌린지_Day 89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단어는 시에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세계, 미래, 사랑, 기계, 영원, 천사, 바다, 숲, 여름, 겨울, 비, 눈, 유령, 죽음!”
시인들은 웅성거렸다. 누군가는 탄식했고, 누군가는 심하게 좌절해 상담 치료를 신청했다. 고선경 시인의 시 ‘스트릿 문학 파이터’ 속 ‘금지어 미션’. 나는 그 장면을 읽으며 오래전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두 번째 책을 준비하던 시절, 문학을 전공한 편집장이 내게 ‘금지어 목록’을 건넸다. 너무 많이 쓰여 의미가 닳은 말들—사랑, 그리움, 바다, 하늘, 그리고 세계. 나는 그 종이를 받아 들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날 이후 나는 언어의 폐허 속을 헤맸다. ‘사랑’을 쓸 수 없으니 ‘온기’를 불렀고, ‘세계’를 피하다 ‘창문 바깥’을 썼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단어를 붙여도, 문장은 조금씩 말라갔다. 마치 금지된 말들이 내 안에서 생명을 꺼뜨린 것처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되자, 문장은 점점 겉돌며 나를 배반했다.
금지어 목록은 점점 길어졌다. 단어들은 죄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사랑받은 게 문제였다. 수많은 입술이 그 단어를 지나치며 의미를 훼손했다. 사망선고를 받은 언어들, 이미 죽은 단어들의 묘비를 지나며 나는 아직 온기가 남은 말을 찾아다녔다.
‘사랑’을 죽인 건 사랑이 아니라, 그것을 가볍게 다룬 인간의 경솔함이었다. ‘죽음’을 낡게 만든 건, 그 단어의 무게를 외면한 인간의 경박함이었다. 말이 아니라 마음이 먼저 닳아 있었다.
결국 나는 그 종이를 버렸다. 금지어를 피하느라 진심을 에두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시 ‘사랑’을 썼다. 닳고 닳은 단어라도, 내 입술에서 처음 태어난 듯 불러야 했다. 진실이 늘 새로울 수는 없지만, 진실의 전달 방식이 새롭다면 그 진심은 언제나 새롭다고 믿었다.
나는 오늘도 낡은 단어의 옷을 입은 채 글을 쓴다. ‘사랑’이 숨을 들이쉬고, ‘죽음’이 고개를 들고, ‘미래’가 눈을 뜨는 순간. 죽은 줄 알았던 언어가 다시 살아난다. 그것을 진심으로 부르는 한 사람의 숨결 속에서. 그 부활의 순간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
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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