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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민주주의를 버리지 못하는 이유

100일 챌린지_Day 88

by 윤소희

누군가 내게 “책 좀 추천해 달라”고 말할 때마다 마음이 일렁인다. 그 말은 어쩐지 ‘나 대신 살아달라’는 부탁처럼 들린다. 어떤 책을 읽을지는 곧 어떤 세계를 살아낼지를 고르는 일이다. 그 선택을 타인에게만 맡길 수는 없다.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만나는 것이다. 읽는 행위보다 중요한 건 수많은 책들 사이에서 하나의 빛을 알아보고, 손을 뻗어, 끝까지 읽어내는 그 여정이다. 무엇이 궁금하고, 무엇이 아프며, 지금 어떤 언어가 필요한지—

그 질문을 통과하지 않은 독서는 남이 남긴 감동의 그림자를 밟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고함(고전 함께 읽기)’ 5기가 막 시작되었다. 책 선정은 언제나 민주적 절차로 진행된다. 추천과 투표, 끝없는 의견 조율. 때로는 지루하고, 심지어 허무하다. 그럼에도 나는 그 과정을 생략하지 않는다. 책을 만나는 일의 절반은 바로 그 느린 선택 속에 있기 때문이다.


이번엔 다수가 『작은 아씨들』을 택했다. 그러나 정작 신청자는 많지 않았다. ‘읽고 싶다’는 가벼운 손짓이 ‘읽겠다’는 결심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선택의 자유에는 환호하지만, 결과의 책임 앞에서는 침묵한다. 민주주의의 약점이자, 피로다.


아이들과 매년 떠났던 한 달 여행에서도 나는 늘 그 피곤한 민주주의를 고수했다. 두브로브니크의 스르지 산에서 케이블카를 탈지 말지를 놓고 긴 토론이 이어졌다. 결국 우리는 타고 올라가고, 걸어서 내려오기로 했다.

올라갈 땐 3분이면 충분했지만, 내려오는 길은 한 시간이 넘었다. 햇빛이 반짝이는 자갈길을 걷고, 불안한 찻길 가장자리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며 우리는 서로를 탓하지 않았다. 스스로 선택한 길은 피곤했지만, 그 피로는 기묘하게도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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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선택한 길은 피곤했지만, 그 피로는 기묘하게도 아름다웠다.


민주주의의 본질은 효율이 아니라 존엄이다. 글을 쓸 때도 정답을 빠르게 찾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느리게 탐색하며 자기 언어를 발견하는 과정이다. 남이 닦아놓은 문장으로는 결코 자신의 이야기에 닿을 수 없다. 누구도 대신 써줄 수 없고, 누구도 대신 걸어줄 수 없다. 글쓰기와 독서, 그리고 삶은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진다. 피로하고 느리더라도, 그 좌충우돌의 탐색이야말로 가장 인간적인 길이다.


나는 여전히 추천하지 않는다. 책을, 문장을, 그리고 삶을. 직접 고르고, 직접 걸어가는 그 느린 길 위에서만

우리는 자기 언어를 만나게 된다.


그 느림이야말로, 존엄의 다른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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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의 인생은 모두가 한 편의 소설이다 ―

루이자 메이 올컷 『작은 아씨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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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 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24년 단편소설 '지금, 정상'으로 소설가 등단.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윤소희 작가와 함께 책 읽기’ 등 독서 커뮤니티 운영.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심리장편소설 <사이코드라마>와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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