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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Feb 08. 2021

나는 몰랐지만 내 왼손은 알아챈 일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어느 나른한 봄날 늦은 오후. 도저히 도서관 안에 틀어박혀 있을 날씨가 아니어서 지루한 책을 덮고 그녀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찬란한 햇살 아래 우리의 젊음이 싱그럽게 빛나는, 스물한 살의 봄날. 이 아름다운 봄날을 헛되이 소비하고 싶진 않던 우리는 빛을 받아 한없이 반짝이는 캠퍼스를 걷고, 걷다가 교문 앞에서 버스를 탔다.  


창가에 내가 앉고 그 옆에 그녀가 나란히 앉았다. 창 너머 밀려드는 햇살의 따사로움에 나도 모르게 잠시 눈을 감았다. 힘이 풀려 보드랍게 늘어지는 봄날 오후, 달콤한 낮잠이 살짝 나를 유혹했다.  


그때, 그녀가 내 손을 잡았다. 


녹신한 봄날 햇살 아래 무방비하게 놓여 있던 나의 왼손을 지그시 누르며 그녀의 오른손이 포개져 왔다. 아……. 나도 모르게 들릴락 말락 한 작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가볍게 묶어 놓았던 스커트 자락이 스르르 풀려 부끄러운 곳이 드러나기라도 한 듯 스스로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난 깜짝 놀라 눈을 떴고, 내 왼손 위에 포개진 뜨거운 기운을 확인하고자 시선을 왼손으로 옮겼다. 내 손보다 조금 크고, 조금 더 두툼한 그녀의 손이 살포시 내 왼손 위에 포개져 그녀의 다섯 손가락이 내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깊이 들어가 내 왼손의 손등을 뒤에서 끌어안은 형상이다. 그녀는 절대로 내 손을 아프게 하지 않겠다는 듯 힘을 뺀 채 가볍게 쥐고 있었지만, 그녀의 다섯 손가락은 그 얽히고설킨 포옹을 쉽게 풀어주지 않겠다는 듯 견고해 보였다. 손등으로 느껴지는 그녀의 손바닥은 뜨겁고 축축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녀의 긴 손가락으로 내 손등을 포위해 잠그고 묶어 놓은 내 왼손이 잠시 미세한 경련을 일으켰다. 갑자기 몸이 후끈 달아올라 얼른 고개를 버스 창밖으로 돌렸다. 하지만 시야에는 그 어떤 풍경도 들어오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밥 먹으러 식당을 갈 때도, 심지어 쉬는 시간 화장실을 갈 때도 나란히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같이 가는 게 여자들의 세계 아닌가. 햇살 찬란한 봄날 오후에 사람들 많은 버스 안에서 동갑내기 동성 친구와 나란히 앉아 손을 잡았다 해서 얼굴이 벌게지거나, 온몸이 뜨거워지며 부끄러워지거나, 손가락으로 꼭꼭 묶인 그 포옹이 한없이 불편하게 느껴져 빠져나오고 싶어 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 반응이 아닐 수 없다. 나도 모르게 슬쩍 곁눈질로 그녀의 옆얼굴을 확인했다. 그녀가 맞다. 매일 수업을 같이 듣고, 도서관을 같이 가고, 학생식당에서 같이 밥을 먹는, 동성 친구. 


"어, 저 밖에 보이는 저 사람 수진이 닮았다!" 


나는 있지도 않은 과친구 수진이를 닮은 여자 핑계를 대며 그녀의 관심을 창밖으로 유도했다. 견고해서 결코 풀리지 않을 것처럼만 보였던 그녀의 손가락들 사이에서 내 왼손을 비틀었고, 한없이 어색한 손가락들의 포옹을 풀고 빠져나온 왼손으로 버스 창밖을 가리켰다. 그리고 내 몸 전체를 자연스럽게 창밖으로 틀었다. 겨우 빠져나왔다. 나의 왼손은 그녀의 손을 벗어났음에도 한참 동안 뜨거웠다. 


5년 뒤. 

뜨겁게 흥청대는 술집에서 테킬라 한 병을 시켜 놓고 졸업 후 오랜만에 만난 대학 때 단짝 친구 네 명이 모여 앉아 술잔을 높이 들었다. 그녀도 그 안에 있었다. 엄지와 검지 사이의 손등에 레몬즙을 살짝 문지르고 소금을 뿌린 뒤, 혀로 그 소금을 핥은 뒤 소금 맛이 입에 퍼질 때 테킬라를 원샷으로 들이켜고 바로 레몬 조각을 입으로 문다. 테킬라 잔을 원샷할 때도 우리는 물론 3단계를 잊지 않는다.  


Arriba, Centro, Dentro! (술잔을 들고, 가슴에 갖대 댄 뒤, 입으로!)  


한창 우리를 매혹했던 파격과 정열의 술 테킬라가 몇 잔 돌자 우리 모두는 흥청거리고 있었다. 


그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진실게임'을 하고 있지 않았는데도, 그녀는 '진실'을 들고 나왔다. 나머지 우리들이 계절 따라 남자 친구를 몇 번씩 바꾸도록 단 한 번도 연애를 한 적 없던 그녀가 드디어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상대는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던 모임을 리드하던 네 살 많은 여자였다. 소위 말하는 '커밍 아웃'을 한 셈이다.  


그녀는 몸에 레몬즙을 문지르고 소금을 뿌린 뒤 그 부위를 혀로 핥고 소금 맛이 입에 퍼질 때 테킬라를 원샷하고 그녀의 그녀가 입으로 물고 있는 레몬 조각을 깨무는, 테킬라 '바디 샷(Body shot)' 과정을 천천히 묘사해 주었고, 우리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묘사를 들었다. 책이나 영화에서 접하는 것 외에는 벌 없는 꽃들의 연애에 대해 무지했던 우리는 막연히 그 세계를 넘겨다 보고 짐작할 뿐이었지만, 진심으로 그녀가 시작한 사랑을 기뻐하고 축복해 주었다. 


그 순간, 잠시 아득하게 밀려오던 어느 봄날의 햇살을 난 기억 해냈다. 그 햇살 아래 나도 모르게 뜨거워져 민망했던 나의 왼손을……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되었다. 5년 전 내 머리는 알지 못했던 사실을, 나의 왼손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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