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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Mar 04. 2021

이제라도"미안하다"고해, 이  xxx야!

어느 소심한 '미투'

(이 매거진 내 모든 글은 '손바닥만 한 소설' 즉 콩트입니다. 실화가 아닌 허구입니다.)


선생님 


안녕하신가요? 아, 선생님께 마지막으로 편지드린 게 30년도 더 된 일이라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당시 선생님 나이가 제 나이 두 배였는데, 이제 제 나이가 그때 선생님 나이보다 많아졌네요. 선생님도 환갑이 넘으셨겠어요.  


설마 절 잊으신 건 아니죠? 빼곡히 적은 편지를 편지봉투에 예쁘게 담아 단 하루도 빠짐없이 드렸던 학생이니 분명 기억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때 드린 수백 통의 편지들은 다 버리셨겠죠? 사실 다시 선생님을 뵙거나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될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두려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몰래 편지를 갖다 놓기 위해 매일 전교에서 1등으로 학교를 갔어요. 아무도 없는 학교 교무실 문을 드르르 열고 선생님 책상에 편지를 놓고 살금살금 나오는데, 어느 날 선생님과 딱 마주쳤죠. 그 전날이 선생님 숙직이었던 걸 몰랐던 저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실 그렇게 마주칠 때만 해도 그 뒤에 더 놀랄 일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몰랐죠. 그리고 그날 그 자리에서 저는 생애 첫 키스를 하게 됩니다.  


그때까지 19금 영화 한 편 제대로 본 적 없던 제게는 엄청난 충격이었죠. 입속으로 물컹한 혀가 들어오다니요. 열여섯 키만 컸을 뿐,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숙한 어린아이였거든요. 그날 이후, 갑자기 오랜 시간을 압축해 살아버린 듯, 이미 늙어버린 듯 묘한 기분으로 세상을 살게 되었어요. 엄마에게 말 못 하는 비밀이 생겨버렸으니까요. 


얼마 안 가 졸업을 하고, 선생님 댁을 찾아갔던 일 기억하시죠? 이른 저녁이었는데, 마침 선생님이 안 계셨어요. 사모님과 귀여운 아이의 재롱을 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선생님이 돌아오셨죠. 아쉽지만 너무 늦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바로 인사를 하고 댁을 나섰어요. 선생님은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주겠다며 따라 나오셨죠. 술냄새가 살짝 났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는 골목이 몹시 컴컴했어요. 정확한 단어들은 이제 기억나지 않지만, 아직도 선생님을 사랑하느냐 같은 질문을 받았죠. 그맘때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평생 사랑이란 걸 처음 해보았으니, 당연히 사랑이 어떻게 변하나 싶었습니다. 선생님은 제 대답을 듣더니, 갑자기 방향을 돌려 제 손을 잡고 으슥한 골목으로 끌고 가셨어요.  

뭔가 좋지 않은 일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불안감이 엄습했고, 그 일이 터지면 어쩐지 선생님께 큰 해가 될 것 같았어요. 그 와중에도 선생님과 사모님 그리고 그 아이를 걱정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따라가지 않겠다고 반항했고, 한참을 끌고 가던 선생님이 마침내 손을 놓아주셔서 버스를 탈 수 있었습니다. 


그 모습이 제가 본 선생님의 마지막 모습이라니... 놓아주기 전 제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하셨던 마지막 일만큼은 죽을 때까지 절대 잊지 못할 겁니다. 


선생님, 

최근 몇 년 ‘미투’다 뭐다 시끄러운 거 알고 계시죠? 많은 여자들이 부끄러운 과거를, 아픈 상처를 드러내고 있는데, 그걸 볼 때마다 괜히 울컥했어요. 가끔은 이유 없이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30년 전의 저야, 제가 먼저 선생님을 사랑한다고 꼬리를 친 셈이니, 제 입술을 가져가셨다 해도 ‘미투’라고 할 수 없잖아요. 그렇죠?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는 선생님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으니, 저는 아주 몹쓸 년이고요. 


졸업 후 1년쯤인가 지나서 선생님께 전화가 온 적이 한 번 있었어요. 기억하시죠? 그때는 휴대폰이  있던 시절이 아니니, 저희 집으로 전화를 거셨죠. 몹시 큰 용기가 필요하셨을 거예요. 힘들게 전화 주셨는데, 제가 몹시 쌀쌀하고 냉랭하게 전화를 받았던 걸 기억합니다. 그게 선생님을 위해 해 드릴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라 여겼어요.  


선생님,  

그때 전화하셨을 때, 말씀하셨어야죠.  

선생님이 제게 하셨어야 하는 말은 '보고 싶다'가 아니라 ‘미안하다’입니다. 

이제라도 미안하다고 해, 이 개새x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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