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소희 Dec 04. 2023

나는 나예요, 나는 나라고요!

존엄


어렸을 적 읽었던 수많은 공주 이야기 중, 진짜 공주는 아니지만 공주로서의 존엄을 끝까지 지켜낸 소공녀 세라에 유독 끌렸다. 세라는 아버지의 죽음과 파산 소식으로 하루아침에 거지로 전락한다. 배고픔을 견디지 못해 죽음마저 생각했던 순간, 진흙에 반쯤 파묻혀있던 동전 하나를 발견하고 빵 여섯 개를 산다. 빵을 막 입에 넣으려는 순간, 서서 떨고 있는 거지 아이를 발견하고 빵 다섯 개를 떨리는 손으로 아이에게 건넨다. 


진짜 공주가 되려고 애썼을 뿐이에요. 제일 춥고 배고플 때조차도.


소공녀 세라


왕족의 피나 예쁘고 화려한 외모, 휘황한 보석으로 장식된 왕관이나 화수분처럼 솟아나는 재산이 없어도, 심지어 누구 하나 공주라고 불러주지 않아도, 그 어떤 상황에서도 공주로서의 향기와 존엄을 잃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진정한 공주가 아닐까.


한때 남의 집을 전전하고 다니며 딱딱한 바닥에서 자기도 했다. 때로 일자로 몸을 펴기도 어려워 기역 자로 구부리고 자거나, 냄새나는 이부자리에 몸을 뉘어야 할 때 분명 괴롭고 힘들었지만, 제일 춥고 배고픈 순간에도 소공녀 세라나 스칼렛 오하라를 떠올리며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몇 달째 수입이 없던 중 우연히 오래전에 숨겨 놓고 잊고 있던 비상금 봉투를 발견했다. 몹시 기뻐하며 그 돈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떠올렸지만, 봉투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고 내어놓았다. 절박한 돈이었지만 나보다 훨씬 더 어려운 사람을 돕고 나니, 힘든 현실을 견디기가 수월해졌다. 나 자신을 좀 더 좋아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저는 물, 이란 단어를 들으면 '날 물로 보지 마' 그렇게 악다구니를 쓰던 어떤 분이 떠올라요. 그래서 물은, 제게 언제나 한없는 약자, 괴로운 것, 흩어지는 것, 소멸하는 것으로 다가오지요. 어떤 사람의 세상 끝에 서 있는 듯한 절규 때문에... 그 사람은 자기 입안에 샴푸, 못, 유리 등을 집어넣으며 그렇게 악악 댔어요. '개새x들아, 날 물로 보지 말라니까' 권력과 완력 이딴 것을 갖지 못한 벌거벗은 사람이 자기 몸을 그렇게 찢어가며 작은 자기를 지키고자 하는 그 절망스러운 몸짓에 오래 마음이 아팠죠. 돈 없고 빽 없는 것들만 모인다는 여름 감옥 작은 방. 수십 명이 우글거리며 행여 몸이 닿아 더 무더워질까 모두 칼잠을 자는 그 잡범들의 방에서 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이었어요. 물이란 말은.


민주와 운동으로 감옥 생활을 했던 어느 시인의 말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향기와 존엄을 잃지 않는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목숨마저 내어놓아야 할 만큼 절박한 일일지 모른다. <책 읽어주는 남자>에서 한나가 종신형을 선고받을지언정 자신이 문맹임을 끝까지 숨겼을 때, 행복과 생명을 포기하더라도 지키고 싶었던 게 바로 존엄이 아니었을까.


영화 <책 읽어주는 남자>


오페라 <나비부인>에서, 나비부인은 '영예롭게 살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영예롭게 죽어라'라고 새겨진 단도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을 버리고 떠난 사람에게 구차하게 사랑을 구걸하기보다는 영예롭게 죽어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 싶었던 것이다.


오페라 나비부인 초초상 자살 장면


자신이 세운 영예로운 삶의 기준이나 존엄을 지키기 위해 목숨마저 던지는 사람들을 볼 때, 한때 자포자기하고 자학했던 순간들을 떠올린다. 뼛속까지 아프다. 잘못된 선택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난을 때, 나를 무너뜨린 건 그 비난의 말들이 아니라 자학과 자괴였다. 남들의 평가보다 스스로를 좋아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훨씬 더 아팠다. 내 존엄을 짓밟는 건 세상의 권력이나 힘이 아니었다. 권력이 나를 작은 공간에 가두고 손발을 꽁꽁 묶어 놓거나 나의 무릎을 꿇릴 수는 있어도, 그런 상황에서조차 내가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다. 그 누구도 침해할 수 없는 자유. 


바닷물이 파란 이유


바닷물이 파란 건 바다가 다른 색은 다 흡수하면서 파란색만을 거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가장 거부하고 밀어내는 것이 결국 나 자신을 규정할지 모른다. 상처나 슬픔, 또는 단점 같이 내가 거부하는 모습으로 규정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싫은 모습마저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나예요, 나는 나라고요....'

남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움직이지도 않았다. 나는 나라는 그러니까 모르는 사람을 역시 모르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그녀의 주장이 문득 슬프고 공허하게 느껴졌다. 여자의 흐느낌은 울음으로 바뀌었다. 딱하게도 그녀는 같은 말만을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나는 나예요, 나는 나라고요, 나는 나란 말이에요.'


밀란 쿤데라 <견딜 수 없는, 미쳐버리고 싶은> 중


'그 사람 어떤 사람이야?'라고 물을 때, 우리는 그의 직업이 무엇이고 어느 학교를 나왔으며, 어디에 살고 있는지 따위를 얘기한다. 누군가는 그의 키와 혈액형, 별자리와 MBTI를 얘기할지도 모른다. 그가 순정한 첫사랑을 오래도록 간직하고 가슴에 불같은 열정을 지녔으며, 세상의 약자들을 볼 때마다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라고 이야기해 주는 사람은 흔치 않다. 


살다 보면 이 넓은 세상, 수십 억이나 되는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지독한 고독감을 느낄 때가 있다. 나를 잘 안다는 듯 꺼내는 말들이 오히려 내 어깨를 더 시리게 하기도 한다. "나는 나예요, 나는 나라고요!" 절규해도 결국 상대는 '모르는 사람을 역시 모르는 사람으로 정의하는 주장'으로밖에 듣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생각하지 않는 곳에서 존재한다. 
-자크 라캉 <에크리>  중



존재하는 곳에 생각이 드러나고, 생각하는 곳에 존재가 드러나도록 사는 것, 즉 삶과 생각이 일치하도록 사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습관적으로 몸을 움직이거나, 마지못해 하는 일들만 떠올려도 존재와 생각을 일치시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쉽게 깨달을 수 있다. 시키는 대로 '네, 네' 하며 다 해놓고, 가슴속에 꿈틀거리는 자유와 저항 정신을 알아달라고 하면, 그걸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이 상처 입는 게 두려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잘 드러내지 않는다. 사는 일이 고달파 자신 외의 누군가의 내면을 읽는 데 시간과 정성을 쏟을 여유가 없다. 결국 제대로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않고 껍데기만 훑으며 스쳐간다. 다른 사람의 내면의 텍스트를 읽지 못하고, 자신도 읽히지 않는 텍스트로 살아간다.



누가 읽어주기만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다가가 다른 누군가의 내면을 읽으려고 노력해 보면 어떨까. 껍데기에 다 드러내지 못하는 그 너머의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깜짝 놀랄만한 보물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례하게 비판과 충고를 던지는 대신 상대의 내면을 읽어내기 위해 집중한다면, 상대방도 마음의 문을 열고 내게 다가올 것이다. 조금만 더 내면을 읽기 위해 노력하면 사랑하다 헤어졌을 때 바로 원수가 되는 일도 줄어들 것이다.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과거를 맹목적으로 답습하지 않고 솔직하고 당당하게 나만의 향기를 찾아 드러내 보자. 내 생각이 내 삶으로, 존재로 드러나도록 살기 위해 매 순간 신중하게 선택해 나간다면, 내가 삶으로 써 내려간 문장들이 아무에게도 읽히지 않고 내팽개쳐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강한 존재의 힘도 스스로 존엄을 지키는 자를 파괴할 수는 없다.





윤소희 작가

책 읽어주는 작가 윤소희



2017년 <세상의 중심보다 네 삶의 주인이길 원해>를 출간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2006년부터 중국에 거주. ‘책과 함께’라는 커뮤니티를 운영하며 책 소개와 책 나눔을 하고 있다. 

전 Bain & Company 컨설턴트, 전 KBS 아나운서. Chicago Booth MBA, 서울대학교 심리학 학사. 

저서로는 <세상에 하나뿐인 북 매칭> <산만한 그녀의 색깔 있는 독서> <여백을 채우는 사랑>, 

공저로 <소설, 쓰다> 등이 있다.


강연 신청 및 상위 1% 독서 커뮤니티 무료입장


https://link.inpock.co.kr/sohee_writer


이전 01화 내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쥐를 좋아해도 괜찮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