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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소희 Dec 11. 2023

정말 내 생각일까?

생각

커피를 처음 마셔본 건 고등학생 때였다. '커피 둘, 프림 둘, 설탕은 노'를 외치며 취향이 있다고 우쭐했었지만, 커피에 크리머나 우유를 넣지 않는 지금 생각하면 경악할 선택이었다. 내 취향이라 우겼지만, 실은 엄마의 취향을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었다. 누가 딱히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내가 뭘 좋아하는지조차 외부로부터 자연스럽게 규정되어 버린 셈이다. 



감각은 날카롭게 하되 까다롭게 굴지는 말자는 생각에 연한 커피부터 탕약처럼 진한 에스프레소, 카세인나트륨이 듬뿍 들어간 믹스 커피나 자판기 커피까지, 누가 어떤 커피를 내놓아도 맛있게 잘 마실 수 있다. 그럼에도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커피가 뭔지 분명히 안다. 


어차피 불평 없이 어떤 커피든 다 잘 마실 거면서 굳이 내가 좋아하는 커피가 뭔지 꼭 집어 얘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정말 뭘 좋아하는지도 모르게 되어버릴 수 있다. 한때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커피 크리머가 들어간 커피를 좋아하는 줄 알고 마셨던 것처럼.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를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왜냐하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때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그나마 열리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 사람으로 남기 때문이다.

홍세화 <생각의 좌표> 중


커피 맛이 뭔지 아직 모를 때, 남들과 다르게 '설탕은 노'라고 말하는 엄마의 취향이 괜히 좋아 보여 따라 했다는 걸 알고 난 후에야 내가 진짜 좋아하는 게 뭔지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나 취향을 갖게 되었는지 질문한 후에야 그 생각을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약간의 심리학 이론만 이용해도 두 남녀 간에 큐피드처럼 사랑의 불을 지피는 것도, 사랑하고 있는 두 사람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도 어느 정도 가능하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지 않으면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것이 뭔지,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가 누구인지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질문의 답조차 남의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믿으며 살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왠지 오싹해진다.


조금 덜 좋아하는 커피를 마시며 평생 산다 해도 물론 큰일은 아니다. 하지만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 옳고 그름을 분별해야 할 때 등 좀 더 중요하고 심각한 상황에서라면 어떨까. 내 생각을 분명히 알지 못한다면, 국가나 상사, 부모 등 나보다 힘이 센 존재의 생각에 저항 없이 따르며 노예로 살 수 있지 않을까.


좋아하는 전공을 포기하고 관심 없는 전공이라도 점수 맞춰 더 좋은 대학에 들어가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는다면? 내가 당하고 싶지 않으면 다른 아이를 따돌리는 데 동참하라는 반 친구의 말을 듣는다면? 객관적으로 인사고과를 준다면 마지막 승진 기회를 놓친 박 과장은 회사를 떠나야 하고, 그런 박 과장을 봐준다면 열심히 일을 잘해 온 김 부장이 억울하게 나쁜 고과를 받아야 한다면?


삶은 끊임없는 선택의 연속이고, 판단하고 결정을 내릴 때마다 세상은 내게 세상의 가치를 주입시킬 것이다. 물론 내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조용히. 어스름이 깔리고 밤이 다가오는 것보다 더 은밀하고 고요하게.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우리를 은밀히 노예로 만드는 유혹이다. 이에 비하면, 폭력으로 통치하는 방법은 그다지 겁나지 않는다.

에티엔느 드 라 보에티 <자발적 복종> 중


일부러 의식하며 '정말 그럴까?'를 묻고 답을 찾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코 자기 생각의 주체가 될 수 없다. 정말 내 생각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확고한 자기 생각이나 자기 철학을 갖는 건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는다. 넓은 세상에 뛰어들어 다양한 경험도 해야 하고, 간접적인 경험을 위해 책도 많이 읽어야 하고, 홀로 고민하는 고독한 사유의 시간도 필요하다. 자기 생각을 다듬기 위해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시간 역시 필요하다. 


뉴스 하나를 보더라도 '저런 결정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해가 되는 게 아닐까' '누가 가장 이득을 볼까' 등을 물어야 한다. 질문하는 과정에서 자기 생각과 철학의 확고한 뼈대가 세워지고 살이 붙게 된다. 결국 세상을 향해 눈과 귀를 활짝 열어 놓되, 정확한 판단을 위해 여러 각도에서 다시 들여다보고 사유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한국에서 대학 교육까지 마치고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였다. 교수들에게 거침없이 묻고, 수업시간이든 쉬는 시간이든 자유롭게 토론하는 학생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충격을 받았다. 한창 견문을 넓히고 자기 철학의 뼈대를 세워 하야 할 학창 시절에 입시 준비에만 매달리는 한국 교육에서 생각의 주체가 되는 당연한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다.



처음 커피를 마시던 순간으로 돌아가 본다.

"엄마, 좋은 대학 가려면 공부를 많이 해야 하는데, 졸음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셔야겠어요."

"좋은 대학 가는 게 너한테 왜 중요한데? 졸음이 쏟아지는 건 충분히 자지 못해서가 아닐까? 졸음을 쫓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이 정말 커피를 마시는 걸까?"

이렇게 질문해 줄 엄마가 없더라도 이제는 스스로 질문할 수 있다. 


경험과 지식이 쌓여가면서 생각과 취향도 계속 변한다. '에스프레소 도피오 주세요' 하고 주문한 후 크레마가 흩어지기 전에 단숨에 마시는 걸 좋아하고, 공정무역으로 들여온 커피를 마시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기도 한다. 아예 커피를 줄이고 다양한 차를 즐기기도 한다.



커피 한 잔을 마셔도 내 생각의 주체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내가 솔직히 글을 쓸 때만큼은 생각을 짜내느라 고통스러워하는 대신, 누군가 불러주는 글을 받아 적고 싶다. 하지만 결국 그 누군가의 목소리도 나 자신의 목소리여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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