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 日記
밤 내 바람소리를 듣다가
아침,
네 얼굴과 구렛나루를 바라보니
내 일생이 거울속에 있구나
-설직의 秋朝覽鏡 중-
沙漠
마음속엔 늘 사막이 자리잡고 있다.
광활하고 공허하며,
때로는 뜨거운 카라부란(黑暴風)이 불고
때로는 오도오돌 떨게하는 한기가 넘실대지만
캐러반들의 발자취가 넉넉한 소로가 있고
저 먼 히말라야 만년설이 모래 저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오아시스를 이루는
사막, 그곳이
내 인생의 타클라마칸이다.
감귤빛으로 채색한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넜다. 제주공항에 내려 택시로 제주항에 갔다. 밤새 인천에서 제주까지 큰 화물선에 실려 내려온 차를 찾아 바로 성산으로 향했다. 올망졸망한 아들 셋을 데리고 읍사무소에 가서 전입신고를 마쳤다. 담당 주무관이 우리 주민등록증 뒷면에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성산읍 온평상하로 OO길’이 적힌 투명 스티커를 붙여 주었다.
“이제 제주도민이 되었어요.”
“제주에서의 첫날인데, 인증샷은 남겨야지.”
기념이 될 만한 장소를 찾다가 성산읍사무소가 세로로 크게 쓰여진 정문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로 했다.
“웃자. 웃어. 스마일. 김치. 치즈”
아내와 아이들에게 웃음을 독려하며 셔터를 연신 눌러댔지만 긴장하고 어색한 표정이 가득한 사진만이 담길 뿐이었다. 아이들 역시 낯선 곳의 공기가 어색했나 보다. 자신들의 의지가 아닌 타의에 의해 친구들과 헤어지고 제주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하는 아이들은 ‘김치’라는 아빠의 신호에도 억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고 엄마 품이 좋은 막내 녀석만 신이 나서 이곳저곳을 깡총대며 뛰어놀 뿐이었다.
전입신고를 마치자, 어제 부쳤던 이삿짐 트럭이 도둑처럼 들이닥쳤다. 고민할 새도 없이 작은 집 곳곳에 이삿짐을 부려놓아야 했다. 제주에서의 첫 하루가 훌쩍 지나가 버렸다. 정돈되지 않은 집안, 사위를 감싼 눅눅하고 습한 제주 장마철 공기, 그리고 경황이 없어 느끼지 못했던 배고픔이 어둠과 함께 몰려오자, 아내가 까칠해졌다. 아내는 언제나 유쾌하고 늘 웃는 긍정의 아이콘이다. 단, 배고플 때는 빼고 말이다. 그래서 즉각 짐 정리를 중단하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해 성산읍내로 향했다.
“제주 첫날밤인데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흑돼지? 회? 아니면 고기국수?”
기대감에 들떠 성산읍내를 두 번이나 돌았지만, 겨우 저녁 8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었을 뿐인데도, 식당들은 장사를 마무리하고 가게 문을 닫고 있었다. 허기진 배에 꼴깍대는 침을 삼키며 제주 시골로 이사 온 것을 실감했다. 어제까지 살던 도시에서는 한창 사람들이 벅적대는 골든타임이었는데, 제주 시골 읍내는 깜깜한 심연 속에 묻히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여전히 영업중인 부대찌개 집을 찾았다. 식당 사장님 역시 우리처럼 육지에서 입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해서 친근감이 더했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제주 입도 첫날밤에 먹은 부대찌개는 육지 어느 부대찌개집보다 맛있었다.
“맛있는 건 어디서나 다 맛있네. 제주살이도 다 똑같을 거야. 조급하지 않게 느긋한 마음으로 누리고 살자!”
배가 부르자 이내 긍정성을 회복한 아내는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며칠간 부지런을 떨며 작은 집에 큰 짐을 욱여넣고, 새집 살이에 필요한 것들을 정돈하고, 삼시 세끼 밥을 챙겨 먹고, 아이들을 학교와 유치원에 보내고, 그래도 시간이 날 때는 부부가 가까운 근처 동네로 마실을 나갔다. 해는 지면 가로등이 드문 온평리 마을은 금세 어두워졌다. 이른 아침을 사는 마을 어르신들 역시 하루를 일찍 마감하는지 집집마다 불이 일찍 꺼졌다. 나 역시 적응하다 보니 하루하루를 기록하고 반추할 틈도 없이 바빴던 하루를 이르게 마감하곤 했다. 이렇게 제주에서의 6월이 흘러갔다.
주말 저녁, 우리 가족은 짬을 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번 주 어땠어요?”
“표선 해비치 해수욕장에서 모래놀이 재미있었어요. 게도 잡았어요.”
”집에서 젠가놀이 재미있었어요.“
”엄마가 구워준 제주흑돼지 맛있었어요.“
”엄마는 동문시장 구경도 재밌었고요. 세화해변이 좋았어요.“
”음, 아빠는 1115번 산록도로 드라이브가 좋았어요.“
직장생활을 하던 육지에서의 일요일 밤은 야속하게 다 흘러버린 주말을 놓지 않고 어떻게든 부여잡고자 했던 불면의 밤이었다. 자리에 누워 ‘일주일간 뭐하면서 살았지?’라고 자문할 때마다 자책과 회한으로 이불을 뒤집어 쓰기도 했고 다가오는 내일을 맞이하기 싫어 새벽까지 뒤척이기도 했다.
입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신기하게 육지에서의 불만족스러웠던 삶은 기억의 저편으로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불면증과 어깨를 짓누르던 육신의 피로, 우울증세가 제주 바다에 이는 하얀 포말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제주에서 맞는 일요일 밤은 지난 일주일의 행복함을 반추하는 느낌표가 되었다. 아이들은 여전히 작은 거실에 모여 잔다. 자는 모습조차 미소짓는 것 같아 아빠로서 행복했다. 깊은 밤에 혼자 컴퓨터를 켜고 일주일간 찍은 사진들을 꺼내 보았다. 제주를 배경으로 나와 아내, 아이들의 다채로운 표정과 일상들이 차곡차곡 담겨 있었다. 사진을 보니 배가 불렀다. 의지를 내어 제주라는 공간과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시간을 산 것은 정말 잘한 일이었다.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세화해변을 걸었다. 해안도로 앞, 에메랄드 바다를 바라보며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멋진 카페가 있었는데, 큼지막하게 쓰여진 ‘제주에 오길 참 잘했다’는 문구가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제주에 오길 정말 잘했지!"
아내가 찡긋 웃어주었다.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