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08. 테트리스 게임
제주, 작은 시골 마을, 십여평 남짓한 작은 집으로 이사를 결정한 후 아내는 본격적으로 테트리스 게임을 시작했다. 삼십삼평 아파트 곳곳에 놓인 가구와 침대, 가전제품들을 제주 작은 집에 배치하기 위해 종이에 도면을 그리기를 수차례, 결국 끙끙대며 앓는 소리를 내다가 연필을 집어 던지며 게임을 끝내기는 했지만 말이다. 아무리 머리를 써봐도 집을 줄여 가는 판국에 세간을 모두 가져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십년 전 서울 변두리 외지고 작은 빌라에서 소박하게 시작했던 살림살이가 언제 이처럼 부풀어 비대해져만 갔는지, 중년이 되면서 불룩해져만 가는 내 뱃살처럼 부담스러웠다.
늘 없다, 늘 부족하다 불평만 해댔던 내 모습이 돌연 부끄러워졌다. 참 많이도 가지고 있었는데, 가지고 있던 것들도 향유하지 못했으면서 늘 새것만 바랐구나!
가정을 이루고 세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자라나는 아이들과 비례해 불어난 살림살이를 하나둘씩 꺼내 정리하는 것은 우리 부부가 수일 동안 매달려야만 하는 만만치 않은 노동이 되었다. 하지만 육체적 고단함 못잖게 ‘버림과 남김’ 사이에서 끊임없는 선택을 해야 하는 정신적 피로감 역시 만만치 않아 며칠간은 밤만 되면 너덜너덜 흐느적대는 파김치마냥 침대에 쓰러지곤 했다.
손이 가지는 않는데, 막상 버리려니 아까운 물건들이 꽤 많았다. 한켠에 쌓아 보니 이내 소복한 동산을 이뤘다. 쌓인 옷가지며 아이들 장난감, 책과 앨범에는 나름의 사연들이 담겨 있었기에 인생의 페이지들을 기억 저편으로 넘겨 버리는 게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의지를 내어 무심하게 놓아버리고자 하니 얽어맸던 옛 모습에서 탈피한 것처럼 개운함도 컸다. 버리고 비우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영역인 것 같다. 익숙하지 않았지만 과감히 버리기로 했다. 지나보니 삶도 컴퓨터처럼 정기적으로 포맷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버리고 나니 홀가분했고 당분간은 삶이 쌩쌩하게 잘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버리고 묶어 갈무리하는 바쁜 며칠을 보낸 후 드디어 이삿날을 맞이했다. 포장이사라 나름 편할 거라 생각했는데, 긴장했는지 온 가족이 아침 일찍 일어났다. 근 6년 만에 하는 이사라 더 힘든 느낌이었다. 버린다고 버렸는데, 짐은 여전히 넘쳐났다. 이삿짐을 싸는 분들은 능숙한 베테랑들이라 아침 8시부터 시작하더니 3시간 만에 쓱싹쓱싹 박스 포장을 마치고 이내 사다리차로 짐들을 내리기 시작했다. 약 8톤이나 되는 짐들이 10톤짜리 트럭 짐칸에 요리조리 차곡차곡 쌓여 갈수록 6년을 산 아파트는 휑하니 비어만 갔다. 추억은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허한 느낌이 아파트 곳곳에 드리워졌다. 시원섭섭했다. 깔끔하게 비워진 집을 바라보니 이젠 우리 가족의 흔적을 하나도 느낄 수 없었다. 정들었던 집이 이제 남의 집이 되었다.
‘텅빈 거실에 바람이 불고 모래언덕이 번져나갔다. 이내 아득한 사막이 자리하더니 공간은 나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돌아보니 나는 이방인의 모습으로 사막 끝에 서 있었다.’
이삿짐을 싣고 남은 트럭의 빈 공간에 다른 짐을 실어 완도까지 내려간 후 바다를 건너야 그나마 수지가 맞는다고 투덜대던 트럭 기사는 미련도 없이 트럭을 몰고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이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우리 가족은 이곳에서 하루를 더 머물고 내일 비행기로 제주로 내려가 온평리에서 이사 트럭을 맞이해야 했다. 집을 비웠으니 부동산에 가서 집을 인계하고 전세 보증금을 돌려 받았다. 갈 곳 없어진 아내와 아이들은 근처 지인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홀로 차를 운전해 인천항으로 갔다. 자동차 역시 인천과 제주를 오가는 화물선에 태워 제주항으로 보냈다. 지하철을 타고 다시 되돌아 왔다. 정처없는 신세가 되다보니, 오랜기간 살아온 이 동네가 갑자기 낯설어졌다.
‘이제 섬으로 가는구나! 몇 년을 살아낼까? 우리 가족에게는 어떤 미래가 펼쳐질까?’
마치 미지의 세계와 조우하는 것처럼 설렘과 두려움이 밀물처럼 들이닥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