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버린 마흔 중년의 제주섬 치유기
휴직 첫날 월요일. 회사 사무실 각층을 돌며 본사 임직원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지방 직원들께도 전화를 돌렸다. 악수를 하며 혹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동료들의 목소리에는 여러 느낌들이 배어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사내놈이 육아휴직이라니.’
하긴 스스로 돌아보아도 웬 용기로 이렇게 질렀는지 모르겠다. 간절했기 때문이겠지만, 동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 겁도 났다.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겠지? 아니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거나....’
회사 정문을 나서니, 비로소 실감이 났다. 이제, 진짜 시작이구나. 1년간의 휴직. 그리고 제주에서의 삶.
나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손으로 적는 다이어리를 산다. 그리고는 항상 버킷 리스트(bucket list)를 적곤 했었다. 어찌보면 대리만족의 일종이었을 테다. 하나하나 적으면서, 이번 생애에서는 불가능할 것 같지만 그래도 포기하기는 아까운 것을 꾹꾹 눌러 적고는 했다. 또, 의지만 내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하지 못하는, 잡힐 것 같은데 잡히지 않는 신기루 같은 것들도 버킷리스트에 쓰곤 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지리산 종주’였다.
걷다 보면 지혜를 선물해 준다는 지리산(智異山)이 정말 나 같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도 지혜를 줄까?
지리산을 걸으면서 휴직의 삶을 열고 싶었다. 혼자서 30여km를 묵묵히 걷고 싶었다. 그간 가슴속에만 담아두었던 생채기들을 터벅터벅 걸어 낼 발자국과 함께 털어버리고 싶었다. 가쁜 숨을 내쉬다 돌아보면 광활하게 펼쳐져 있을 백두대간의 푸른 산맥들을 보고 싶었다. 고되게 산마루를 오르다 잠시 멈추면 허벅지 말초신경에 짜르르 흐르는 작은 경련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와 부리나케 배낭을 꾸렸다. 30리터도 안되는 배낭에 이박삼일간의 음식과 옷가지를 욱여넣어 메어보니 당최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일만 하느라 운동을 전혀 하지 못했기에, 가느다란 다리와 배불뚝이 허약 체질로 이 무거운 배낭을 메고 이박삼일을 걸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도 갈 거야. 후회하고 싶지 않으니까!”
남들은 일과를 마치고 퇴근하는 시간이었는데, 난 배낭을 메고 기차역에 갔다. 주말이면 종주자들로 가득 찬다던 주중의 22:45분 용산발 무궁화호는 텅텅 비어 있었다. 사람들이 듬성듬성 앉은 무궁화호 기차가 플랫폼을 떠나기 시작했다. 어둠 속 점점이 박혀있던 도시의 불빛들이 명멸하며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자 비로소 내 모습이 차창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노는 사람. 가난한 사람. 하지만 행복하기로 한 사람.’
규칙적으로 덜컹대던 무궁화호 기차 한 켠에 내가 12년간 항상 꿈꾸었던 쉼의 순간들이 느릿느릿 흐르고 있었다.
선잠을 자다 깨기를 몇 차례, 기차가 구례구역에 도착했다. 기차 한량에 듬성듬성 섬처럼 가라앉았던 산손님들이 일제히 활화산 마냥 생기를 분출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차에서 내려 마주한 구례구역을 비추던 새벽 달빛은 휘황하고 찬란했다. 앞으로 펼쳐질 내 삶의 굴곡은 짐작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날의 달빛만은 환히 비춰주기를 바랐다.
여명이 트기 전 사위를 감싼 칠흑의 어둠을 헤치고 성삼재부터 노고단까지 걸었다. 전망 좋은 곳에서 흐린 날의 일출을 감상했다. 굽이치는 산마루를 산안개가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운무가 춤추는 동안 시간도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지리산의 녹음도 진하게 번져 났다. 도시 잿빛 콘크리트 더미에서 자의반 타의반 부속이 되어 끊임없이 회전만 했던 내 톱니바퀴 인생을 잠시 멈춰 세우고서 난 지리산에서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임걸령과 돼지령, 피아골 삼거리, 노루목, 삼도봉, 화개재를 지나 연하천 대피소까지 걸었다. 산철쭉은 피고 져서 스쳐버린 봄날의 분홍빛 상흔을 등산로에 뚝뚝 남겨 놓았다. 너덜길을 하염없이 올랐다. 나목이 되어 메말라 가는 천년 주목들의 무덤밭도 지났다. 까마귀는 큰 날개를 펼치며 날아올랐다.
의욕 넘치게 내딛던 발걸음은 오후가 되자 천근만근 무거워졌다. 잠깐잠깐 멈춰 지리산을 음미했던 눈길은 바닥에 딱 붙어버렸다. 이박삼일 먹거리가 담긴 배낭이 버거워서 틈이 나면 벗어 던져버렸다. 새벽 4시 반부터 내쳐 걸었기에 기진맥진했다. 오후 5시가 다 되어 벽소령에 도착했다. 나무산장 한구석에 모포 두 장을 깔고 누웠다. 어둡기 전 라면과 참치캔, 햇반을 섞어 짜글이를 만들어 저녁을 먹었다. 지리산에서의 하루, 그간 일상과는 다른 하루의 첫날이었다.
벽소령 대피소에서 맞이한 둘째 날은 참 맑았다. 아침 햇살이 작은 불투명 창문에 부딪혀 부드럽고 화사하게 산장 내부를 밝혀 주었다. 이날은 세석평전을 거쳐 장터목까지만 걸으면 되었기에 여유로운 마음이라 아침 곳곳이 풍요로웠다.
날이 좋으니 지리산은 한층 싱그러웠다. 등산로에도 햇빛이 마중 나와 있었다. 하루 치 먹거리가 사라진 배낭도 한결 가벼웠다. 선비샘에서 시원한 물을 들이켠 후 물통에 샘물을 가득 채웠다. 몸에 생기 역시 가득 채웠다.
“난 살아있어.” 돌길로 된 오르막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기암절벽 사이로 푸른 숲과 고사목이 어우러져 있었다. 고개를 들면 파란 하늘 아래 햇빛이 검날처럼 번쩍였다.
행복감에 취해 걷다 보니 세석평전이 펼쳐졌다. 바윗돌 백두대간이 굽이치다 툭 트인 고원에 잔돌을 잔뜩 뱉어낸 평야 같은 세석평전에는, 6월이라 구상나무가 짙은 초록들을 한껏 뿌려 놓았다. 마치 푸른 구름 위를 걷는 느낌이었다. 연하봉을 거쳐 장터목에 이르렀다.
햇빛이 한창인 오후 3시였다. 장터목 대피소에 짐을 부려놓고 맨몸으로 천왕봉에 올랐다. 해발 1915m의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봉우리로 가는 길에는 키 낮은 덤불 사이로 죽어 말라가지만 여전히 옹골차게 대지에 뿌리를 박고 세월의 상흔을 새기고 있는 천년 주목들이 사열하듯 늘어서 있었다.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하다’라고 적혀 있는 천왕봉 표지석 옆에 기대 앉아 하늘을 올려 보았다. 정상에 왔지만 하늘은 여전히 높았다. 평일 늦은 오후라 고요함이 사위를 감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하늘멍 때리기에 좋은 날이었다.
저녁에는 장터목 대피소 난간에 앉아 지리산의 석양을 바라보았다. 붉게 사그러지는 여명을 배경으로 산그리메는 성큼 다가섰다가 돌연 암연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윽고 별빛이 초롱대며 밤하늘을 수놓더니 이내 우수수 산장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른 잠을 자고 새벽에 다시 천왕봉에 올랐다. 산행객들의 이마에서 빛나는 랜턴불을 따라 오솔길을 걸었다. 산이 높아서 새벽에는 무척 추웠다. 산정상 여기저기서 많은 산손님들이 옹송거리며 일출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르자 아득히 먼 곳으로 주홍빛 선이 반듯하게 그어지더니 곧 핏빛처럼 붉어져 창공을 물들였다. 사람들의 감탄 속에 맑고 동그란 해가 굽이치는 산등성이 위로 쑥 떠올랐다. 오늘은 오늘의 해가, 내일은 내일의 해가 매일매일 떠오르지만, 천왕봉에서 바라본 일출은 특별한 감동을 선물처럼 안겨 주었다. 나도 모르게 팔을 크게 벌려서 뜨거운 해를 더 뜨겁게 감싸 안았다.
가파른 길을 하염없이 걸어 중산리 방향으로 하산했다.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전주 누나 집에 들렀다. 며칠간 세수를 못해 꾀죄죄하고 수염이 덥수룩한 얼굴이었는데, 버스터미널에 픽업을 나온 누나의 첫 마디가 가슴에 남았다.
“동생. 얼굴에서 맑은 빛이 나는데!”
어이쿠! 마흔 넘고 냄새나는 아저씨 얼굴에서 밝은 빛도 아니고 맑은 빛이라니. 빤한 공치사였지만 기분이 무척 좋아졌다.
왠지 다가올 제주생활에도 맑은 빛이 흐를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