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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내음 Aug 18. 2024

삶은  흘러가고

오블라디 오블라다

 “앙코르! 앙코르!”

  마지막 곡이 끝나자, 박수와 함께 청중들의 환호가 터져 나온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다. 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빙 둘러앉은 관객들이 환한 미소를 머금고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계절과 시간은 한 해의 끝자락을 알리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몇 년 전 글쓰기 반에서 만났던 문우였다. 매주 목요일 만났던 글쓰기 수업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고, 고쳐 쓰고 때로는 비평하고 격려도 했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나의 첫 글에 대해 진심 어린 격려를 해줬던 그의 목소리는 그때와 변함없이 따뜻했다. 반가움에 내 목소리도 자연스럽게 한 톤 높아졌다.      


 "아, 웬일이세요?"

 그는 아마추어 밴드에서 베이스기타를 담당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내게 건반 연주를 맡아줄 수 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새로운 경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한번 해보겠어요!”라고 답을 했다.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결정을 내린 나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신기했다.      


 초저녁의 홍대 앞 거리는 한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활기가 넘쳤다. 화려한 조명이 번쩍이는 거리에는 멋지고 개성 있는 차림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고,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의 물결이 출렁였다. 나는 지도 앱을 켜고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모두가 나를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목적지에 도착해 허름한 건물의 계단을 내려가면서,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내 나이에 밴드라니, 과연 이 선택이 맞는 걸까? 클래식 음악에서 쌓아온 경력이 무색해지는 건 아닐까? 혹시 내 학생이나 아는 사람을 마주치면 민망해서 어쩌지?‘     


 묵직한 문을 밀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흐릿한 조명 아래, 몇 명의 악기 연주자들이 보였다. 베이스 기타리스트, 드럼 연주자, 클라리넷 연주자, 그리고 보컬 겸 기타를 맡은 꽁지머리의 남자 등, 평범해 보이지 않는 네 명의 남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서먹했다. 자꾸 움츠러드는 나 자신을 스스로 다독였다. 수십 년 동안 클래식 피아노를 해온 내 실력이라면 밴드 음악쯤은 식은 죽 먹기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건반 앞에 앉아 연주를 시작했을 때 소리가 나지 않자, 순간 당황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스위치를 켜지 않은 것이었다. 기계치인 나에게 수많은 부호와 숫자가 가득한 전자 건반을 다루는 일은 복잡하고 까다로웠다.     


 밴드 음악은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했다. 각기 다른 소리가 조화를 이루어 아름다운 화음을 만들어 내는 순간은 즐겁고 짜릿하지만, 여러 사람의 개성이 모이다 보니 때로는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기도 한다. 한 번은 밴드 연습 중에 멤버들 사이에서 곡의 템포와 음악적 해석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었다. 기타리스트와 관악기 주자는 조금 더 여유 있고 느리게 연주하길 원했고, 나와 드러머는 반대로 더 신나고 경쾌하게 몰아붙이려 했다. 각자의 마음과 소리가 엉켜 하나의 멜로디로 나아가지 못했다. 연습은 중단되었고, 연습실 안의 공기는 묵직해졌다. 결국 여러 시도 끝에 서로의 의견을 조금씩 양보하고 타협점을 찾았다. 마침내 하나의 음악으로 합쳐질 때까지….     


 밴드를 시작한 지 벌써 삼 년이 지났다. 코로나로 인해 연습이 중단되기도 했지만 우리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첫 공연을 열기로 결정했다. 연주를 앞두고 우리는 마치 학예회를 앞둔 초등학생처럼 설렘과 기대에 가득 찼다. 공연일이 다가올수록  더욱 열정적으로 연습에 몰두했다. 연습 중 녹화한 영상을 함께 보면서, 공연을 더욱 멋지게 만들기 위해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았다.     


 연주 날이다. 화려한 조명이 비추는 자그마한 공간에 관객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채운다. ‘잘할 수 있을까?’ 우리는 떨리는 마음을 숨기며 서로를 바라본다. 건반 소리가 부드럽게 흐르기 시작하자, 그 소리 위로 다른 악기의 선율이 겹쳐지며 공간을 가득 채운다.            


 ‘Ob-La-Di, Ob-La-Da‘가 오늘의 마지막 곡이다. “쿵 따라 따따 따따따 따 쿵작 쿵작 쿵작 쿵작” 건반이 가볍고 경쾌한 리듬을 타기 시작하고, 이어서 베이스, 드럼, 클라리넷, 기타가 차례로 리듬과 화음을 더해간다. 마치 내가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 우리를 이끄는 것처럼 우리는 음악 속에서 하나가 된다. 황홀하고 짜릿한 순간이다.         


 마지막 코드가 울리고, 관객들의 박수 소리가 아득하게 밀려온다. 그 순간 깨닫는다, 내가 미처 알지 못했을 뿐, 세상 모든 것에는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는 것을. 나의 음악도, 삶도 계속 흘러간다. 그리고 나는 또 다른 시작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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