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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rondelle Apr 29. 2020

3. 바람과 추억과 향 그리고
녹차얼그레이

MY  DRINK  DIARY

Green tea  +  Earl grey









낯선 곳에서 부는 바람에 익숙한 감각과 향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데자뷰처럼 어디선가 마주한 것 같고, 들어보거나 가본 것 같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리지만 가끔씩 찾아오는 이 순간만큼은 기쁨에 가득 차 근심 걱정 없고 편안한 마음 상태가 된다.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한 걸음 내딛고,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 보면 만나게 되는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만남이 생긴다.     


몇 해 전 여행을 떠났을 때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있었다. 

어디론가 무작정 가고 싶기도 했고,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족했다. 

그렇게 해서 여행을 떠나게 되었는데, 막상 도착을 하고 보니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부터 시작해서 ‘여행을 하면 지금의 상황이 뭐가 달라지기라도 하나?’ 라는 생각의 꼬리를 물며 우울함이 절정으로 치달았다. 그렇게 터덜터덜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계속 그렇게 걷다보니 짜증이 나고 울화가 치밀었다. 눈에서 눈물도 살짝 나오기까지 했다.

기분전환 하려고 온 여행에서 조차 우울함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서 ‘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질렀다고는 했지만 엄청 큰 소리는 아니었다.)


순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에 부끄러워져서 발걸음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이제껏 걷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니 바람이 불어왔다.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의 세기와 온도, 그리고 향이 언젠가 느껴봤던 아련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언제였더라?’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며 얽혀있던 감정들을 진정시켰다.     

한결 나아진 상태에서 구경을 시작하니 내가 좋아하는 소품, 잡화 상점들이 마구마구 들어왔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들어간 상점에서 오늘의 주인공인 녹차 얼그레이를 만났다.     

패키지 디자인이 마음에 들어 ‘어머 이건 꼭 사야해’ 하면서 걸음을 옮기다가 패키지 내용물이 녹차라는 사실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사실 녹차를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즐기는 편도 아니어서 살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얼그레이로 블렌딩이 되어있다는 표시를 보고 다시 장바구니에 담았다. 

90%는 패키지가 맘에 들어서 산 것이지만 숙소로 돌아가 차를 우려 마시고 나니 잘 샀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한 풀잎 향의 풋풋한 녹차 맛과 향기로운 얼그레이의 베르가못 꽃 향의 조합이 꽤 적절했다. 

마치 봄날의 싱그러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그 바람 안에 머물고 있는 은은한 꽃향기에 잊고 있었던 감정들이 떠올랐다.     


슬픔인지 기쁨인지 모를 모호한 감정이 여러 갈래로 뒤엉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고 긴 숨을 내 쉬었다.      


‘아! 나 지금 여기에 있지!’     


약간은 안타까운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그 이후로 여행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집으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     

몇 년 후가 될 진 모르지만 다시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이 차가 생각날 것 같고, 그때로 돌아갈 것 같다.   




  


+인스타 연재분을 수정, 보완 작업하여 업로드합니다.

+인스타: @hirondelle_y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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