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을에 마음껏 물든다
꽃을 단 대궁
열매를 터트린다
가는 실타래 풀어내며 꿀렁이는 바람
마중 나온 구름
꼬투리를 열어본다
흙냄새 따라 비탈을 두드리던 바다
넝쿨 사이로 빼꼼
콩깍지 솜털을 쓰다듬는다
물구나무서서 기다리던 심장 콩알콩알
붉어진 얼굴 저 혼자 새끼손가락 걸었다
진한 초유, 솥에 넣고 불을 지핀다
해 품에서 달궈진 언덕
아궁이에 들어있다
부푸는 거품
콩물이 끓는다
해풍이 안고 온 입술
비밀에 엉긴다
털을 핥던 고양이
새털구름을 묻히고 기지개를 켠다
부엌문 열고 나오는 구름 한 사발
노을에 마음껏 물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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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늘 빛이고 색이고 질감이다. 어쩌면 기억일지도 모른다.
불투명한 흰색의 작은 병이 있다. 스포이드를 깊숙이 넣는다. 눌렀던 고무 헤드에 힘을 뺀다. 공기의 힘을 빌어 가득 채운다. 긴 유리관이 꺼내온 건 아주 특별한 색이다. 심장 위에 쭉 짠다면 노을빛으로 물드는 사람 하나 있을 것이다.
또 하나의 시작은 무엇이 끝나는 순간에 가장 진한 색으로 물드고야 마는 것이다. 빛의 이야기다. 자연에서 여문 것들은 시간의 증거를 보여주고, 최고의 희열을 터트린다. 싹 틔우고 꽃 피워 꼬투리 속에서 살아낸 풍경의 씨앗이다.
산바람, 바닷바람... 바람이라는 이름. 뭔가를 기다리는 일 같기도 하다. 그래서 번지는 일, 퍼지는 때, 그 풍경에 말을 잃게 되는 것일까? 누구에게나 바람의 때가 오리라는 것. 그래서 산골짜기도 바다의 끄트머리도 다 번지고 있다. 바람이 지나는 길에, 빛이 지나는 시간에 순한 색이 동그랗게 태어나는 것이다. 노을빛 가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