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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은수 May 17. 2024

아픔의 방 - 1

1분 소설

나는 올해 스무 살이고, 오십 여덟 번째 아픔을 기록하여 벽에다 붙였다. 공중전화 부스만 한 방에서 나는 멍멍히 서 있었고 머리를 헤집고 들어오는 문장들이 곧 온몸으로 번질 것만 같았다. 얼른 적고 방문을 열었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오십 여덟 개의 아픔이 한꺼번에 밀려오니까.


내가 처음 이곳에 발을 들인 건 유일한 혈육이었던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였다. 완치되었다 믿었던 공황은 할아버지의 장례를 치를 때 한 번 더 나를 찾아왔고 그것이 이번엔 더 오래갈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그래서 는 죽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번에 죽는 번도 죽어보지 않은 나에게 큰 어려움이었다.


할아버지가 없는 미래는 앞서나갈 생각 없이 이 자리에 머무르려 하며, 내가 없을 미래는 자꾸 지난 길로 돌아가려 한다. 구체적으로 생각하자니 괴로웠고 잠시 자고 일어나면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었다. 그게 죽는 것이든 살아가는 것이든.


집으로 돌아온 뒤, 낮잠만 여섯 시간 가까이 잤고 일어나기 직전엔 가위까지 눌려 온몸에 힘을 주어야만 했다.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세우자마자 기지개를 켰다. 헛헛한 마음에 눈물이 났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살고 싶어졌다.

살고 싶어 지니까 갈증이 났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목이 타들어 갔다. 냉장고 문을 열어 주전자를 꺼내었고 설거지가 되어 있지 않은 어지럽혀진 싱크대 위로 하나 남은 할아버지의 컵을 보았다. 주전자를 기울여 물을 따라 입 안에 머금었는데 술 냄새가 풍겨오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항상 술을 그 컵에 따라 마셨기 때문이다.

이제는 삼켜야 할 때다. 오래 머금으면 물이 더 따뜻해져 버리니까.


가장 방은 할아버지가 사용했다. 다시 할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러 들어갔는데,  못 보던 문이 생겼다. 내가 미치긴 했구나 싶어서 오른쪽 뺨을 세게 한 대 쳤다. 그래도 문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문과 함께 방의 형체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번엔 눈을 감았다 떠 보았는데 어느새 그 방은 내 코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처음 보는 방인데 문 손잡이를 제외한 외관 전체가 낡아 있었고 손이 닿는 부분만큼은 깨끗했지만 그럼에도 덜컥 열기엔 불안하고 거부감이 들었다. 한참 동안 문 손잡이를 주시하다가 그것으로부터 멀어지기로 했다. 황급히 할아버지의 방에서 나와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세게 닫았다. 설마 하고 다시 열어보니 할아버지의 방 안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 헛것을 보았겠거니 하며 다시 내 방으로 가려 돌아섰는데 또, 코 앞에 문이 있었다. 새것처럼 빛나던 문 손잡이가 약 일 센티쯤 더 튀어나온 것 같았다. 마치 자기를 당겨보지 않겠나 압박하는, 아니 자기를 당기지 않으면 너는 죽게 될 것이라고 협박하는 듯 보였다. 방금 살기로 했는데, 금방 죽을 순 없는 노릇이다.

나는 그것의 문을 열었고 그 안은 연두색 꽃무늬 벽지로 도배되어 있었다. 넓은 공간에 작게 머물고 있는 것보다 좁은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편이 나았다. 그곳에 더 오래 있을 방법을 모색하다가 번뜩이는 생각한 줄이 머리를 스쳤다. 조심스레 문을 열고 나와 흰색 포스트잇과 볼펜을 챙겨서 다시 그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첫 번째 아픔을 적어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잊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적었다. 그러나 이 마음을 잠시 내려두고 싶었고 아주 많은 날이 지나고야 다시 지겠다는 의중으로 기록했다. 모든 아픔은 아주 멀리 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이렇게 잠시 맡아 두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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