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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CA May 19. 2020

마음은 늘 소년인 노감독의 오케이 컷

영화 페인 앤 글로리 Pain and Glory

지난 1년 간, 전 세계에서 가장 핫 했던 영화는 단연 '기생충(PARASITE)'이었다. 'The 기생충'을 열외로 잠시 밀어놓고, 작년 한 해 이 세상에 나온 영화 중 내 마음속 길이길이 품을 영화는 바로 이 영화 '페인 앤 글로리'다.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통해 이미 내 마음을 한번 뒤 흔든 적이 있다. 마치 그의 소년 같은 마음이 색으로 변해 필름에 들어가 박힌 것 같은 영상미와 과거-현재 감정을 잇는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만의 방식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ing.


살아오면서 받은 크고 작은 상처가 고통이 되어 온 몸과 마음을 장악했고, 그 고통을 원천으로 만든 영화들로 누려온 영광이 쌓여 지금에 도착했다. 제목 그대로 두 가지 단어를 꼽아두고 만든 이번 영화에서 이 거장 감독은 그간 에둘러 표현해온 본인의 상처와 가장 애틋했던 마음을 과감한 직구로 고백해온다. 지난 영화들에 비해 소용돌이치는 서사는 줄었지만, 각 장면마다 훨씬 섬세하고 예민하게 표현되어 영화의 깊이감을 더 한다.


살바도르 가족이 모두 모인 공간, 어린 살바도르의 세계


감독의 인생에 가장 큰 명암을 남긴 엄마.

엄마를 향한 감독의 마음은 때론 한없이 아름답고 때론 휘몰아치는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와 같다.


스스로 좁힌 세상에 자가 격리된 채 온갖 고통을 느끼던 주인공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는 우연히 만난 옛 동료로 인해, 잊으려 노력했지만 별 소득이 없던 그의 과거로부터 강제 소환을 당하게 된다.

(안토니오 반데라스가 이 정도로 연기를 잘하는 배우인지 미처 몰랐었다. 그저 능글맞은 조로와 각종 끼를 목소리로 표현 잘하는 장화 신은 고양이 정도로만 기억해왔는데, 이번 영화에서의 그는 2도 정도의 지진 강도마저 느낄 것 같은 예민함을 생생하게 관객에게 전해주는 명연기를 펼친다.)


살바도르가 소환된 과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워서 그녀의 별 볼 일 없는 일상이 더욱 생생하게 대비되어 보이는 엄마 하신타(페넬로페 크루즈)가 있다.

하신타는 어린 살바도르가 바라보는 세상 그 자체. 엄마의 감정이 고스란히 살바도르의 가슴에 선명하게 스민다. 삶이 피곤한 엄마는 떨어져 지내던 아빠가 있는 곳으로 살바도르의 손을 끌고 옮겨 갔는데, 그 공간은 집이라기에도 건물이라 하기에도 애매한 흡사 동굴 같은 곳이었다.

벽돌공을 가장으로 둔 가족은 가난이 일상. 삶이 고단한 엄마는 아들에게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부를 가르친다. 제법 똑똑한 아들은 뒤처지지 않고 공부를 해나가지만, 신부가 되길 바라는 엄마의 바람은 버겁기만 하다.


살바도르의 세계에 색을 칠해준 화가, 에두아르도


억척스러운 엄마는 우연히 만난 청년 에두아르도(세사르 빈센테)에게 살바도르가 글을 가르쳐주는 대신 집수리를 받기로 거래를 한다. 이 거래로 인해 살바도르 집을 드나들게 된 에두아르도. 글과 산수는 모르지만 그림을 그리는 재능이 있던 에두아르도는, 본인의 그림 실력과 함께 집수리를 하던 중 지저분해진 몸을 씻으며 건강한 알몸을 드러낸다. 그의 나체를 본 살바도르는 온몸에 열을 내며 쓰러져 며칠간 앓아눕게 된다.

에드아르도 역의 세사르 빈센테는 피렌체 여행 중 인상 깊게 보았던 다비드상이 연상될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그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살바도르는 자신도 모른 채 품고 태어난 욕망을 깨닫게 된다. 이때 본인이 다른 소년들과 조금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살바도르. 50년이 지나 에두아르도의 그림을 마주한 순간, 살바도르의 얼굴에는 고향에 도착한 방랑자의 표정이 보였다.


아들의 성공을 위해 본인이 철저히 희생했다고 말하는 엄마, 그 마음이 살바도르에겐 늘 버거운 짐. 엄마가 만족할 만큼의 성공을 완성해야만 좋은 아들이 될 것 같은데, 현재는 늘 불안하고 본인이 드러내기 싫은 욕망은 멈추지 않고 넘실거린다. 그 불안함의 기억으로 살바도르의 중심축은 위태롭게 흔들리고 결국 약물 중독에 빠지게 된다. 살바도르에게 엄마는 첫 번째 사랑이자, 첫 번째 고통의 원인이었다.


살바도르 인생의 연인으로 꼽을 수 있는 페데리코


살바도르가 어느 정도 인정받게 된 시기에 만나 가장 뜨겁게 사랑한 연인 페데리코.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살바도르 인생 그래프 중 가장 위쪽에 머물렀을 기간이었으리라. 페데리코가 약물 중독으로 망가져가는 것을 보다 못해 헤어졌기에, 이별의 아픔은 무겁게 남아 살바도르 몸 구석구석 고통을 전했다.


외국에 거주하던 페데리코(레오나르도 스바라글리아)는 오랜만에 돌아온 마드리드의 길을 걷다가 무언가에 홀린 듯 극장에 들어가 살바도르 작 연극 '중독'을 보게 된다.

지난 시절 자신과 애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는 연극을 보고 감격한 페데리코는 살바도르의 집으로 찾아가, 철없던 시절 감당하기 힘든 현실 때문에 방황했던 자신을 사랑해준 구남친에게 늦게나마 미안함과 감사함을 전한다. 중년의 삶을 살고 있는 페데리코가 무척 근사하여 영화에서 보여주진 않았지만 그의 리즈 시절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무기력한 일상에 빠져있던 살바도르는 페데리코와의 조우를 계기로 본인의 몸과 마음을 갉아먹는 고통으로부터의 탈출을 시작하게 된다.


감독 마음의 색을 모두 꺼내 칠한 것 같은 포스터 이미지


지금까지 살바도르 삶에는 세명의 사랑(하신타, 에두아르도, 페데리코)이 늘 함께 였다. 잊을 수 없는 그들로 인해 살바도르는 행복했고 또 괴로웠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앓게 되는 건, 하늘 아래 몇 안 되는 공평함 중 하나인가 보다.


노년의 엄마 푸념에 살바도르가 "그냥 저는 제 자신이었을 뿐이었는데, 엄마를 실망시켰어요. 정말 죄송해요."라고 답하는 장면은 그간 많은 영화에서 '어머니'를 특별하게 표현해온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털어놓는 가장 아픈 자기 고백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문근영 배우가 "타인을 미워했으면 편했을 텐데, 그걸 못해서 나를 미워했다"며 눈물을 흘리는 인터뷰 장면을 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배우로 살아온 그녀의 삶이 녹록지 않았음을, 특별하게 사는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이나 결국 자기 자신과의 평화가 가장 중요한 것임을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과거의 나를 쫓아다니며 충분히 아파했고, 지금의 나를 이해하기 시작한 살바도르.

자신의 아픔을 이유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강력하게 부정하던 영화감독이, 과거의 본인과 화해하며 새로운 영화 작업을 시작하는 마지막 장면은 완벽한 마무리였다.

새로 만들 영화가 젊은 날의 영화처럼 펄떡이고 강렬하지 않더라도, 지금의 그를 닮아 있을 것임은 분명하다. 여전히 본인의 영화 색감 같은 패션을 뽐내는 이 노감독의 오케이 컷이 앞으로도 많이 쌓이길.



내가 밟아온 모든 경험이 나를 살게 하는,
살고 싶게 하는 삶의 수업이었다  




페인 앤 글로리 Dolor y gloria, 2019

스페인 드라마

(감독) 페드로 알모도바르

(출연) 안토니오 반데라스, 페넬로페 크루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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