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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Dec 06. 2023

애주가와 일반인의 뇌구조는 다르다


요 며칠은 저녁 시간대의 카페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았다. 겨울이 되면 오래된 월세집엔 야외취침 맞먹는 한기가 돌아,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자니 손이 시려 결국 따뜻한 카페로 피신한 거다. 막상 해보니 꽤 집중이 잘 되는 데다 연말 분위기도 더욱 진하게 느껴지는 것 같아서 은근슬쩍 저녁 루틴에 끼워 넣었다. 그렇게 퇴근 후 소일거리를 바리바리 싸들고 동네 카페에 출석하기를 여러 날. 딴짓을 하며 주변을 한 번 둘러보다가 문득,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술 여러 잔을 걸친 듯 얼굴이 불콰한 이들이 카페 안에 제법 많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색한 풍경은 아니다. 내가 사는 동네는 회사가 많고, 회식하기 딱 좋은 술집도 많고, 그 술집에서 쏟아져 나오는 붉은 얼굴의 회사원들도 많기 때문이다. 평일 저녁이라는 것도 사실은 크게 중요하진 않다. 나 역시 직장인이고 따라서 평일에는 술을 자제하려 하지만, 어떤 회식은 천재지변과 같아 요일을 가리지 않고 개인의 성향을 고려해 주지도 않으니까. 그러므로 내가 호기심을 느낀 건 좀 다른 관점에서였다. 


도대체 술을 마시고 왜 카페에 가는가?


나는 술 마시고 카페 가는 걸 싫어한다. 내 술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신나게 맥주 마시다가 그게 커피로 바뀌면 김이 새잖아. 볼은 이미 빨개졌고 입 열면 알코올 냄새가 진동할 게 뻔한데, 카페에선 점잖고 멀쩡한 사람처럼 앉아있어야 할 것 같아서 부담스러워.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녔던 내 주장의 논거들을 하나씩 되짚어 본다. 그러니까, 이 모든 이유가 저들에겐 해당이 안 된다는 말이지… 낯선 사고회로를 이해해 보려 애쓰다 나름대로 결론을 냈다. 애주가와 일반인의 뇌구조는 근본적으로 다르구나.


“카페에서 술 좀 깨고 가자.” 


언젠가 한 친구의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일이 있다. 우리는 오래간만에 만나 곱창을 굽고 소주 몇 잔을 털어 넣은 직후였다. 아니, 왜 지금 깨어나려고 하시나요? 곱창으로 뱃속에 기름칠을 했으니 이제 톡 쏘고 소화도 돕는 무언가, 예를 들면 맥주 같은 걸 넣어줘야 이치에 맞는데. 충격에 휩싸인 나를 보고 친구도 충격에 휩싸였다. 아니, 방금 그렇게 술을 마셔 놓고 맥주가 또 들어가? 배 안 불러? 서로를 이해할 수 없는 두 사람은 길 한복판에서 충격의 도돌이표를 주고받다가 결국 카페에 가는 걸로 합의를 보았다. 내가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애주가는 일반인에게 술을 강요해선 안 된다. 그건 애주가 세계의 매너다.


술 약속은 보통 숫자로 구성되어 있다. 1차, 2차, 3차. 늘어나는 숫자에 따라 알코올 누적량도 응당 늘어나야 한다. 그러니까 내가 술자리에 참석할 때의 마음가짐이 그렇다. 애초에 논알코올로 시작했으면 모를까, 알코올로 시작해 논알코올로 끝나는 술자리는 안될 말이다. 술을 마시고 카페에 가면 차수는 늘어나지만 체내 알코올량은 오히려 희석되고 만다. 물론 위의 경우처럼 일행이 원한다면 한 발 물러설 수 있지만, 나는 '술 깨러' 카페에 가면 오히려 졸음이 쏟아지고 컨디션이 안 좋아진다. 체질에 안 맞는다는 뜻이다. 사실 평일에 술 약속을 안 잡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출근이라는 불청객이 테이블 너머에서 나를 노려보지 않는 상황에서 맘 편히 뱃속에 알코올을 쌓으려고.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장소는 꽤 늦은 시간까지 영업하는 동네의 카페다. 시간은 저녁 9시. 2시 방향에 테이블 두 개를 붙여 옹기종기 앉아 있는 이들의 얼굴이 유난히 붉다. 그중 몇 사람이 주변을 어색하게 두리번거리면서 애써 목소리를 낮추려 하는 표정이 여기까지 보인다. 술집이었다면 자신 있게 목소리를 높이거나 와하하 웃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래도 이곳은 캐롤 음악이 나오는 데다 조명도 너무 밝으니까. 게다가 나 같은 사람 몇 명이 자못 심각한 얼굴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지 않은가. 왠지 그 머릿속을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니, 저들은 나와 비슷한 ‘애주가의 뇌구조’를 가진 게 틀림없다. 취향에 맞는 음료 한 잔씩을 손에 들고 즐겁게 이야기하며 '술 좀 깨고' 있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저 모습. 일찍 집에 가긴 글렀지만 그래도 내일의 출근을 위해 가까스로 이성의 끈을 붙잡은 듯한 태도. 그 책임감 있는 모습에 애틋함과 동질감마저 느껴지기에, 비록 30분 전에 비해 목소리가 조금 더 커진 것 같아도 짐짓 모른 척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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