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삭 Nov 29. 2023

앵무새는 생각보다 시끄럽다


앵무새. 지금까지 내가 그 단어를 듣고 연상할 수 있는 거라곤 두 가지 정도였다. 누군가의 말을 그대로 반복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를 때 쓰는 ‘앵무새 같다’라는 표현. 그리고 <알라딘>의 악당 ‘자파’가 키우는 얄미운 앵무새 ‘이아고’. <알라딘>을 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 캐릭터는 앵무새의 탈을 쓴 사이코패스다. 죄 없는 새들에겐 미안하지만 앵무새를 향한 나의 관심이 딱 거기까지였던 것도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는 셈이다.


앵무새뿐만 아니라 ‘새’라는 종족 자체가 내겐 미지의 영역이었다. 도시의 무법자 비둘기, 작고 귀여워서 비교적 환영받는 참새, 한강의 오리, 바다로 놀러 갈 때마다 마주치는 갈매기. 그들 외에 내가 자신 있게 구별할 수 있는 새는 아주 드물다. 그 어떤 동물과도 1:1로 친밀한 관계를 형성해 본 적 없긴 하지만 새는 그게 좀 극단적이라고 할까. 비둘기는 내가 피하고, 참새는 나를 피하고, 한강의 오리는 애초에 다른 차원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다가갈 수 없고, 배가 무척 통통한 갈매기는 내 손에 있는 그것이 무엇이든 가로채 유유히 떠난다. 그러니까 ‘새’는 나 같은 인간에겐 친해질 기회조차 주지 않는, 항상 저 멀리 날아가고 있거나 그럴 준비가 되어 있는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그런 내가 앵무새 카페에 들어선 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친구와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실 만한 곳을 찾는데 맞은편에 범상치 않은 간판의 가게 하나가 시선을 가로챘다. <앵무새 카페>. 음, 인상 깊은 작명이군. 한 번 들어가 볼까. 바보같이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던 거다. 그게 진짜로 앵무새와 함께 커피를 마시는 곳인 줄은. <새=나를 피해 저 멀리 날아가는 어떤 존재>라는 공식을 머릿속에 입력해두고 있던 나로서는 반경 100m 안에 그토록 많은 새가 (도망가지 않고!) 있는 광경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곳은 새가 있는 카페라고 하면 떠올릴 법한 평화로운 풍경과는 거리가 멀었다. 새라고 불러야 할지 공룡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파란색 앵무새 한 마리가 부리로만, 오직 부리의 힘으로만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은 파란색 망고나시를 입고 턱걸이를 하는 헬스장 근육맨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은 나는 앵무새가 7세 어린이의 성량쯤은 가볍게 눌러버릴 정도로 시끄러울 수 있다는 사실 역시 깨닫게 된다. 앵무새한테서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기대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아악!!!“ 하고 연속 고함을 내지를 줄은 몰랐던 나는 급속도로 기가 빨리기 시작했다. 고함 중간중간에 뻔뻔스럽게도 ”안녕?“ 혹은 ”빵야!“ 같은 팬서비스를 시전 하는 앵무새들을 넋 빠지게 쳐다보는 손님들은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아니 얘네 사실 사람인 거 아냐? 혼란과 기 빨림의 한복판에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 이는 단 한 사람, 사장님 뿐이었다. 어디선가 나타나 손님들의 어깨에 앵무새를 얹어주고 홀연히 사라지는, 그 수많은 새들과 친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범상치 않은 아우라를 풍기던 그녀.


나는 피톤치드보단 매연의 비중이 월등히 높은 도시에서 자랐고, 마주치는 생명체라곤 바퀴벌레와 모기 정도가 다인 집에서만 먹고 쉬고 잠들었다. 그래서일까? 동물과 오랜 세월 부대끼고 살아서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는 사람들을 볼 때면 어딘가 신비롭다. 내가 모르는 영역, 내가 가본 적 없는 세상에 발을 디뎌본 사람들 같아서. 꼭 강아지와 고양이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어릴 때 시골집에서 소를 키웠다는 엄마는 내게 “소 눈을 한 번이라도 보고 나면 얼마나 정이 드는지 몰라. 나는 소가 팔려갈 때마다 너무 슬퍼서 엉엉 울었어.”라고 말했다. 소 눈은 정말 예쁜가 보다! 하고 머리로만 이해하는 사람과, 살아 숨 쉬는 소의 눈을 보며 교감한 적 있는 사람의 시야각은 다를 수밖에 없다. 나는 엄마의 말을 듣고도 한참 후에, 한 여행지의 목장에서 마주한 소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나서야 말뜻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앵무새 카페에서 내 어깨에 앉아 귀를 깨물던 조그만 앵무새의 부리는 차갑고 축축했다.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 비현실의 영역에 존재했던 ‘앵무새‘라는 단어가 비로소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온 거다. 비유적 표현이나 만화 캐릭터가 아닌 현실의 존재. 숨결과 목소리가 있는 존재. 아직 머릿속 ‘비현실의 영역’에만 존재하는 수많은 단어들을 그제야 떠올린다. 내 시야가 얼마나 좁은지 실감이 나 끝없이 아득해진다. 스스로의 옹졸함을 깨닫는 건 항상 아픈 일이다. 하지만 욕심내지 않고 한 번에 딱 한 뼘씩만 세상을 넓혀 나가는 걸 목표 삼기로 한다. 팽창하는 우주처럼. 어제보다 오늘 조금 덜 옹졸하면 그만이지 뭐.


귀를 내어주고 잠시나마 쌓은 유대감은 (나 혼자 쌓은 내적 친밀감이긴 하지만) 반려 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삶은 어떤 모습일지 새삼스레 상상해 보게 만들었다. 알러지가 없는 평행 우주의 나는 그럴 수도 있겠지. 고양이나 강아지와 함께 살다 보면 정말 말이 통하는 것 같고 사람처럼 느껴진다던데 앵무새도 그럴까? 음, 생각해 보니 이렇게 고함을 지르는 존재와 한 집에서 산다면, 심지어 내 말을 따라 한다면… 말 그대로 진짜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

이전 02화 한강 야경이 맥주 안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