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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Nov 17. 2023

쓸데없는 개그 욕심을 줄이자


<쓸데없는 개그 욕심을 줄이자>


별생각 없이 과거의 일기장을 들춰 보다가 이런 문장을 발견하곤 등골이 서늘해졌다. 뭐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일기장에 “~하자.” 같은 강한 다짐을 적어둘 정도면 어떤 부끄러운 사건이 있었을 게 분명한데. 아냐, 굳이 떠올리려 하지 말자. 기억이 흐릿한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와 대화할 때 유머코드가 안 맞는다는 사실만큼은 거의 본능적으로 알아챌 수 있다. 서로의 유머가 몇 번 빗나간 다음부터는 아무리 눈치 없는 사람이라도 입 열기가 조심스러워진다. 마치 여섯 번의 기회 중 네 번을 다 써 버린 러시안룰렛처럼 숨 막히는 대치 상황이다. 가능성은 50:50. 운이 없다면 남은 한 번의 조준이 관계를 끝내 버릴 수도 있다. 아, 예외적인 상황도 물론 있다. 예를 들어 직장 상사가 농담을 던졌는데 너무나도 재미가 없다면? 유머 코드는 아무래도 상관없이 치아가 보이게 활짝 웃는다. 러시안룰렛 따위는 잊어도 좋다. 상대는 총알이 무한히 발사되는 무기를 쥐고 있으므로. 이 쪽에서는 그냥 허허 웃으며 총알을 맞으면 된다. 안 죽는다. 월급이 바로 방탄조끼다.


나는 조심성 많은 사람이라서 개그 욕심을 부렸다면 위와 같은 상황은 틀림없이 아니었을 것이다. 대신 꽤나 편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대화하던 중이었겠지. 상대방의 농담에 나름 유머러스한 대답을 하겠답시고 머리를 쥐어짜 받아치고는 스스로의 재미없음에 몸서리를 쳤으리라. 그리고는 은은하게 후회하며 곱씹다가 집에 와서 쓸쓸히 일기를 쓰고, 침대에 누워 이불을 몇 번 걷어차고…


세상에는 별 거 아닌 말에도 활짝 웃어주고 적절한 타이밍에 적당한 추임새까지 땔감처럼 던져주는 천사들이 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이 위험한 거다. 칭찬은 돌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유머 감각은 별로인 주제에 개그 욕심만 있는 사람 역시 춤추게 하니까. ‘리액션 장인’ 앞에서 나는 주머니를 털어서라도 가진 것을 다 내어주고 싶은 심정이 되어 조잘조잘 떠든다. 쓸데없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하고 있다는 경고등이 켜져도 멈출 수가 없다. 상대방의 웃는 모습을 좀 더 오래 보고 싶다. 좋아하는 이들을 웃게 만들고 싶은 건 인간의 본능. 본능을 핑계로 나는 별 거 아닌 말에도 웃어주는 사람들 앞에서 춤추듯 농담하며 같은 부끄러움을 반복한다. 내게 돌아오는 웃음소리가 오르골 멜로디처럼 상큼해서 자꾸만 반복해 듣고 싶다.


결연한 말투로 쓴 일기가 무색하게도 쓸데없는 개그 욕심은 전혀 줄어들질 않았다. 오히려 스스로의 썰렁한 농담이 진심으로 웃기다고 생각하는 지경으로 악화되었다. 이게 다 내 주변의 ‘리액션 장인’들 때문이다. 요즘은 그들에게 약간 물들어 닮아가는 것도 같다. 악의가 담겼거나 무례한 농담만 아니라면 나도 누군가의 말에 성심성의껏 웃어준다. 발끝에서부터 에너지를 끌어올려서라도. 심지어는 직장 상사가 건네는 세대 초월 개그도 가끔은 진심으로 재미있다. 재미있다고 믿으면 정말로 재미있어지는, 그런 종류의 마법에 걸린 건가. 조금 더 진중한 사람이 될 필요가 있나. 그러나 내 웃음소리에 탄력을 얻어 광대가 뽕긋 올라가는 사람들을 보면 이내 입꼬리를 씩 올려버리고 만다. 그래, 웃는 거 뭐 대단한 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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