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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Dec 13. 2023

헬스장 플레이리스트 고찰


모처럼 아무 일정이 없는 토요일 오후. 나는 헬스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눈 뜨자마자 쳐다본 시곗바늘이 벌써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어서 마음이 불편해졌기 때문이다. 겨울이 무르익어가는 요즘엔 눈 깜짝할 사이 해가 져 버린다. 침대에서 미적거리다 해가 지면 아까운 휴일을 날려 버렸다는 자괴감에 휩싸일 게 뻔하니 그전에 뭐라도 해야 했다.


일단 이불을 박차고 나와 헬스장에 도착하니 우습지만 기분이 좀 좋아졌다. 막 회원번호를 입력했을 뿐 아직 운동은 시작도 안 했는데. 비록 어제 술을 많이 마셨고 그래서 12시간을 내리 자긴 했지만, 토요일에도 운동을 빼먹지 않는 나, 그렇게 구제불능은 아닐지도… 지독하게 합리화를 하며 스피커가 찢어지게 터져 나오는 90년대 댄스 음악에 맞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오늘 플레이리스트 좋은데?


소리에 예민한 나는 어떤 공간에서든지 배경 음악부터 파악한다. 회사를 제외하고 일상에서 방문 빈도가 가장 높은 공간은 카페, 술집, 그리고 헬스장 정도. 앞의 두 공간은 기본적으로 대화를 하러 가는 곳이기 때문에 최대한 배경음악이 조용한 곳을 선호한다. 음악이 시끄러운 곳에서는 대화에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다. 내가 아무리 강렬한 비트의 케이팝 애호가라지만 그건 혼자 이어폰을 끼고 있을 때나 즐거운 일이지, 대화 중에 야수 같은 랩과 말벌 같은 초고음이 파고드는 건 조금 곤란하지 않은가.


하지만 헬스장은 다르다. 이곳에서만큼은 완전히 다른 기준이 적용된다. 배경음악은 백색소음의 역할을 할 뿐 절대로 귀에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는 내 기준은 헬스장 유리문을 어깨로 밀고 들어가는 순간 박살이 나 버린다. 이 공간에선 느리고 서정적인 모든 것이 용납되지 않는다. 혹 서정적인 발라드 음악을 재생하고 싶다면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음악의 세계에는 ‘리믹스’라는 비법 양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작자의 의도나 자연스러운 곡의 흐름 따위는 무시하고 모든 부분에서 박자를 쪼개면 된다. 심박수가 150 이하로 떨어지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속도로 편곡을 마쳤다면 헬스장 플레이리스트에 포함될 자격을 얻을 수 있다.


나는 주로 평일 저녁 퇴근 후에 운동을 하러 간다. 이때가 헬스장이 가장 붐비는 시간대다. 달리 말하면 이 시간에 운동하러 오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나처럼 축 처진 어깨로 터덜터덜 입장하는 직장인이라는 것이다. 반지하 자취방에서 키우는 바질 화분처럼 시들시들 맥을 못 추는 직장인들의 심장. 헬스장 플레이리스트가 노리는 목표물은 바로 그것이다. 이럴 수가 있나 싶을 정도로 박자를 쪼개버린 수많은 리믹스 버전 음원들은 무거운 기구와 땀냄새로 가득한 지하 공간에 햇빛 같은 활기를 불어넣는다. 그러면 제아무리 일터에서 기운을 모조리 빼앗긴 직장인이라도 어디에 홀린 것처럼 힘을 쥐어짜 낼 수가 있다. 이들이 스쿼트를 한 개라도 더 하고 집에 간다면 모두에게 해피 엔딩이다. 특히 건치를 빛내며 웃고 있는 트레이너 선생님에게는 더더욱.


심장과 고막을 때리는 헬스장 플레이리스트에서는 ‘텐션 업’을 위한 어떤 결의와 의무감마저 느껴진다. 힘을 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음악이야말로 그 분위기를 만드는 일등공신이다. 가끔은 어이가 없을 정도로 무자비하게 편곡된 ‘헬스장 버전‘ 발라드 음악을 들으며 혼자 허허 웃음 짓는다. 음악이 나를 이끌고자 하는 방향에 기꺼이 따르며 러닝머신의 속도를 높인다. 눈은 TV 속 간장게장 홈쇼핑 방송에, 귀는 스피커에 붙들린 채로 심박수를 올려 본다. 쿵짝 쿵짝 쿵짝짝. 아, 이 리믹스 버전은 정말 아무리 들어도 이상하다. 숨이 차 헐떡거리며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지. 이상하게 힘이 난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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