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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Dec 20. 2023

새우깡으로 되찾은 초심


해외여행은 설렌다. 예상 밖의 일들이 많을 것을 알아서다. 또한 해외여행은 피곤하다. 예상 밖의 일들이 너무 많아서다. 나는 여행을 꽤나 좋아하고 어디로든 자주 떠나는데도 출국 전날의 걱정은 항상 비슷하다. 가방 잃어버리면 어떡하지? 비행기가 연착되면? 사고가 나면? 충전기는 챙겼나? 공항에서 숙소까지 어떻게 가더라? 모든 일에 대비할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비하고 싶은 게 인간의 마음. 내게 여행이란, 스스로를 계획으로부터 좀 해방시키고자 하는 자아와 무계획을 용서하는 자아 사이의 끝없는 싸움이다. 무계획을 용서하는 자아 쪽이 승리하는 거의 유일한 활동이기도 하다.


그러나 때로 익숙함이 침투하는 속도는 걱정이 다가오는 속도보다 훨씬 빠르다. 그리고 익숙함은 지겨움과 어깨를 맞대고 있다. 익숙함을 넘어선 지겨움은 어떤 표현들을 슬픈 과거형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한때 불탔던 사랑, 한때 좋아했던 음식, 한때 설렜던 여행지, 한때 슬펐던 소설, 한때는 가슴 벅찼던 관계 같은.


한때 나는 비행기만 타도 설렜다. 이제는 비행기를 타면 허리가 아프다는 생각을 가장 많이 한다. 한때는 여행지에서 커피만 마셔도 설렜다. 이제는 그 커피가 맛있지 않다면 별 감흥이 없다. 한때는 외국어로 된 영수증과 비행기 티켓을 버리지 못하고 한국까지 고이 모셔 왔다.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티켓을 구겨 호텔 쓰레기통에 버리고 온다. ‘충분히 좋거나 새롭지 않으면 별 감흥이 없는 일’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는 것. 이번에 호주 여행을 계획하면서 가장 걱정했던 게 바로 이 부분이었다. 이렇게 멀리 가는데도 충분히 설레지 않으면 어쩌지? 나는 그 실망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호주로 떠나는 날, 나는 좁기로 소문난 저가항공의 이코노미 좌석에 앉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장거리 비행인 만큼 옆에 누가 앉는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한 외국인 남성이 나타나 아주 조심스럽게 내 옆좌석으로 본인의 몸을 구겨 넣기 시작했다. 솔직히 우리 두 사람의 체격 차이를 감안했을 때 조금쯤은 넘어와도 기분이 전혀 나쁘지 않았을 텐데, 상냥한 그는 원래부터 어깨가 구겨진 채로 태어난 사람처럼 10시간의 비행 내내 단 한 번도 내 자리를 침범하지 않았다. 내 어깨까지 덩달아 저릿해지는 착각이 들 무렵, 그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가 한국 여행을 마치고 호주로 돌아가는 길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가방에서 나온 물건이 새우깡과 바나나 우유였기 때문이다. 설레는 표정으로 사진을 찍는 걸 보니 그건 한국에서의 마지막 기념품 겸 만찬인 듯했다. 이어서 그는 새우깡을 한 개씩 소중히 입에 넣으며 그야말로 <행복>에 가까운 표정을 지었다. 잠시만, 저게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었나? 나한테 새우깡이란 ‘술이 더 마시고 싶은데 배는 부를 때 만만하게 집어먹는 안주’ 정도인데. 하지만 그의 행복 99% 새우깡 먹방을 보고 있자니 점점 마음이 흡족해졌다. 그렇지. 별 거 아닌 과자 하나도 괜히 별미처럼 느껴지는 게 여행이긴 하지. 아무래도 자리가 너무 좁아서, 우리의 어깨가 거의 맞닿을 뻔해서, 그 설렘과 즐거움이 나에게까지 전염된 모양이었다.


고된 비행을 마치고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설렘은커녕 허리와 목이 지독하게 아팠다. 하지만 왠지 새우깡을 음미하던 그의 표정이 잊히지 않고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의 얼굴을 떠올릴수록, 괜히 모든 것을 과장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예약 사이트에서 본 사진보다 뷰가 훨씬 별로였던 호텔에 짐을 풀 때도, 마셔본 것 중 제일 맛있지는 않았던 커피를 마실 때도, 자세히 찾아보면 한국에도 있을 법한 건물과 나무를 보면서도 괜히 “진짜”라는 말을 붙여가며 과장되게 감탄했다. 진짜 좋다! 진짜 맛있다! 진짜 예쁘다! 진짜 신기하다! 


그 결과 나는 똑같은 바다와 똑같은 건물 앞에서 몇 번씩 사진을 찍고, 사소한 귀여움에 감탄하고, 모든 음식과 술을 맛있게 먹어 치우고, 상술에 기꺼이 넘어가며 만 원짜리 키링을 아무렇지 않게 사는, 그야말로 '멋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걱정이 없었고, 편안했고, 동시에 설렜다. 이런 감정이 얼마나 그리웠던가. 


한국에 돌아온 후 호주 여행 어땠냐는 물음에 “이민 가려고요.” 하고 답했다. 물론 농담이고 그만큼 좋았다는 뜻이다. 여행자의 철없는 행복과 이민자의 삶은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는 것을 잘 안다. 그래도 뭐, 사람 일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속으로 생각하며 서울의 출근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소중한 나의 일상이자 누군가에게는 여행지. 10월엔 노을이 예쁘고 1월엔 눈이 쌓이는 곳. 괜히 억지로 감탄할 거리를 만들어 본다. 자꾸만 감탄하는 게 여행의 비법이라면 나는 몇 번이고 다시 할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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