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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Dec 27. 2023

멀티 태스킹은 현대인의 미덕이죠


날이 제법 선선했던 8월 말의 어느 일요일. 나는 친구와 저녁을 먹은 뒤 한강을 산책하고 있었다. 집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한강공원은 그리 가깝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날씨가 괜찮다면 소화도 시킬 겸 그럭저럭 걸어서 다녀올만했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은 '소화시킬 겸’이라는 말을 어찌나 다양한 상황에 갖다 붙이는지!) 우리는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강아지들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며 산책로를 걷다가 좀 특별한 광경을 목격했다.


흙냄새를 맡으며 걷고 있는 흰색 말티즈와 그 몸에 연결되어 있는 리드줄까지는 평범했는데 그걸 잡고 있는 사람이 평범치 않았다. 강아지 주인은 무려 4가지의 활동을 동시에 하고 있었는데, 1)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1-2) 본인도 산책을 하고 2) 리드줄을 잡은 채로 양팔을 90도로 올려 아래위로 반복하는 동작을 통해 어깨 운동을 하면서 3) ‘런지’ 동작으로 틈틈이 하체 운동을 함과 동시에 4) 통화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멀티 태스킹의 귀재,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 걸맞은 인재.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근육과 인간관계도 챙긴다니. 통화하면서 걷기 정도의 멀티 태스킹에도 정신이 산만해져 엉뚱한 대답을 하고 일할 땐 가사 있는 노래도 못 듣는 사람으로서 그저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멀티 태스킹은 점점 현대인의 기본 덕목이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출근하고 퇴근하고 끼니를 챙기고 친구를 만나고 가족을 챙기고 취미 생활과 자기 계발까지 해치우려면 한 번에 여러 가지를 신경 쓸 수 있어야만 한다. 몇 년간의 시행착오 끝에 그나마 터득한 기술은 내게 비교적 덜 중요한 몇 가지 활동을 ‘오토파일럿 모드’, 즉 자동 조종 상태로 돌려놓는 것이다. 예를 들면 아침의 출근 준비 순서를 분 단위로 나누어 정해 두기. 몸이 동선과 순서를 기억하게 되어서 숙취 등으로 정신이 덜 돌아온 날도 무리 없이 출근을 할 수 있다. 옷이나 액세서리, 신발은 계절별로 고정. 계절별 쇼핑에 빨려 들어가는 돈과 시간이 확연히 줄어든다. 평일 저녁 메뉴는 거의 같은 것으로. 요리나 장보기에 드는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특정 요일의 특정 시간에는 무조건 운동하기. ‘운동하기 싫다’ 같은 생각이 끼어들 틈도 없이 운동복을 주워 입고 습관처럼 나가게 된다.


자동 조종 루틴의 최대 장점은 아무 생각이 없이 따르면 되기 때문에 에너지 낭비가 적다는 점이다. 최대 단점은 루틴에 어긋나는 연락이나 모임은 될 수 있는 한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이 부분이 누군가에겐 매정하고 엄격해 보일 수 있다. 소심하게 변명을 해보자면, 내가 딱히 엄청나게 성공하기 위해서 매일의 루틴을 지키는 건 아니다. 그저 큰 노력 없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 양보하기가 힘든 것뿐이다.


이렇게 아낀 에너지는 불시에 나타나는 또 다른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무기가 된다. 하지만 가끔은 그마저도 부족하다. 별 거 아닌 상황에도 나는 과하게 마음을 쓰며 허덕이곤 한다. 타고난 에너지의 총량이 낮은 건지, 좀 더 많은 부분을 ‘오토 파일럿 모드‘로 돌려야 하는지, 그러면 혹시나 내 일상이 너무 무미건조해지는 것은 아닐지. 어디에 신경을 쓰고 어디에 덜 쓸지 결정하는 일은 방 정리하며 물건 버리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몇 년째 안 쓰는 물건들을 결국 버리지 못하고, 안 보이는 공간에 슬쩍 치워두고 외면하는 나. 그렇게 외면한 물건들이 내 방을 어지럽히는 주범이라는 걸 알지만 결정을 내리는 건 역시 쉽지 않다. 깨끗하게 정리된 듯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어수선한 내 방과, 이런저런 일들의 중요도를 저울질하느라 마음 한구석이 항상 은은하게 불편한 방 주인은 어딘가 닮은 구석이 있는 것이다.


강아지를 산책시키면서, 운동을 하면서, 친구와 수다까지 떨 수 있는 그런 능력이 나에게도 있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난 한 번에 한 가지밖에 집중을 못 하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갑작스러운 한파에 보일러가 동파되진 않을지 걱정하느라 키보드를 두드리던 손을 몇 번이나 멈추었다. 마음이 번잡스러운 사람의 일상은 주로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번잡스러운 마음으로도 어떻게든 해내야지 별 수 있나. 내 일상의 톱니바퀴를 굴릴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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