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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Jan 10. 2024

올해는 연말 분위기도 별로 안 나네


"눈 온다!"


금요일 오후 3시, 일하는 척하면서 수시로 창문 밖을 보고 있던 나는 눈 소식을 물어다가 곧바로 팀원들에게 뿌렸다. 엄밀히 말해 서울의 첫눈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눈송이가 손에 잡힐 듯 펑펑 오는 눈은 올 겨울 처음이었다. 옆자리 동료가 내 말을 듣더니 탄식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으악 싫어! 저녁에 약속 있는데!"


하긴, 금요일이라 가뜩이나 붐비는데 눈까지 오면 힘들지. 나 역시 집에 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무지막지한 오르막을 생각하며 씁쓸해하고 있었으니까.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어라, 자리에서 일어난 동료는 어느샌가 창문에 바짝 붙어 눈 동영상을 찍는 중이었다. #함박눈 #겨울 #감성 #올해도안녕. 인스타그램 업로드를 마친 후 그는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나와 함께 꽁꽁 얼어붙을 도로와 안 잡히는 택시 걱정을 했다. 역시 요즘 사람들은 두 개 이상의 자아를 갖고 있는 게 분명하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서 다행이야.


한파 특보가 내려진 날이었다.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옷을 단단히 여미고 심호흡을 해야 할 정도로 추웠다. 겨울은 매년 추울 걸 알면서도 매번 처음인 듯 놀라는 나를, 마치 여름이 영원할 것처럼 겨울용 부츠 하나 사놓지 않은 안일한 나를 탓하며 조심스레 눈을 밟았다. 하얀 입김을 호호 불어가며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린다. 매번 생각하지만 신호등은 너무 덥거나 너무 추울 때 유난히 길게 느껴진다. 칼바람에 귀가 베일 것만 같아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제자리에서 종종거리는 사람들, 이 날만을 기다려 왔다는 듯 각종 방한용품을 전신에 착용하고 여유만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고 있는 사람들, 마침내 해탈을 했거나 혹은 마침내 얼어버린 게 분명한 듯 미동 없이 서 있는 사람들, 그리고 조금이라도 체온을 나누기 위해 서로 껴안고 있는 사람들. 두툼한 외투 때문에 가뜩이나 동그란 실루엣들인데, 뒤뚱거리며 모여 있기까지 하니 정말로 남극 한복판의 펭귄들 같아서 슬쩍 미소를 지었다. 물론 입은 다문 채로. 추울 때 입을 벌리면 이가 시려서…


올해는 연말 분위기도  별로 안 나는 것 같아요. 직장인이 된 이후로 여기저기서 듣는 말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이만하면 연말 분위기 나는 것 같은데? 이 사람들, 이전에는 도대체 얼마나 멋진 연말을 보냈던 거지? 하며 의아해하곤 했는데 이젠 들은 척도 안 하고 넘긴다. 뭐랄까, 너무 들뜨거나 너무 처지기 싫은 어른들의 마음이 담긴 한 마디인 것 같아서. 해가 바뀐다고 세상이 리셋되는 것도 아닌데, 눈밭을 뛰노는 강아지처럼 마냥 해맑기는 좀 머쓱하니 말이다. 연말 같지도 않다면서 동시에 연말이라는 핑계로 각종 약속을 잡고  남은 연차 쓸 계획을 세우고 안부 메시지를 주고받는 귀여운 사람들. 나도 기꺼이 그중 하나가 되어 열심히 송년 모임 장소를 골랐다. 지도 앱에 즐겨찾기 된 장소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술잔을 부딪치며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고. 그 마음들을 모두 헤아릴 수는 없지만 연말이니 얼굴 보자는 핑계로 서로 안부를 물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12월 일정 맞추기에 실패하면 굳이 굳이 ‘신년회’라는 이름으로 해를 넘겨 자리를 만드는 뻔뻔함을 용서하는 사이라서 더욱 좋고. 한 살 더 먹기 싫고 출근도 싫고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다고 투덜거리면서도,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말만큼은 놓치지 않는 다정한 이들에게 마주 미소 지으며 받은 만큼의 복을 돌려준다. 복이라는 건 주고받을 때마다 두 배, 세 배씩 커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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