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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Jan 17. 2024

 나 사투리 하나도 안 쓰는데?


테이블 간의 간격이 무척 좁은 고깃집이었다. 안 그래도 멀티 태스킹이 잘 안 되는데 옆 테이블의 이야기 소리가 자꾸만 귀에 박히니 점점 그쪽으로만 신경이 쏠리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일부러 엿들으려 한 건 아니라고 핑계를 대고 있는 중인데, 내친김에 핑계를 하나 더 추가해 보자면 바로 그 테이블에서 고기를 굽던 네 명의 남성들은 아주 강한 부산 사투리를 쓰고 있어서 소리가 주변 소음에 섞이지 않고 아주 잘 들렸다. 마치 영화 <바람>을 바로 옆에서 상영 중인 느낌이었다고 할까.


나의 부모님은 각각 다른 지역에서 상경했지만 사투리를 거의 안 쓰시고 평생을 서울에서 자라온 나 역시 사투리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다. 살면서 접한 사투리라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미디어 사투리, 그리고 대학 때 만난 친구들이 구사하는 사투리 정도다. 어떤 게 네이티브 사투리고 어떤 게 흉내만 내는 사투리인지도 잘 구별하지 못하는 내가 그분들이 부산 사람이라는 걸 단번에 알아챌 정도였으니, 아주 강력한 사투리였음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듣자 하니 넷은 고향 친구 사이. 서울에서 자리를 잡은 친구를 만나러 나머지 셋이 먼 길을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중 한 명이 특히나 맛깔난 사투리를 구사했는데, (친구들 중 유머를 담당하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우렁찬 사투리로 자신이 지금 서울말을 완벽히 쓰고 있지 않냐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이 우리 일행의 유머 코드를 저격하는 바람에 웃음을 참느라 꽤나 애를 먹었다. 묵언 수행하며 묵묵히 고기를 구워 먹는 우리가 그들 눈엔 꽤나 특이해 보였을 것이다. 저희 싸웠거나 안 친한 거 아니고요. 무례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다 보니 여러 지역의 사투리를 이전보다 자주 접한다. 그렇지만 사투리의 세계란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같은 경상도 안에서도 대구와 부산은 다르고, 그 정도는 인지하고 있지만 막상 들었을 때 정확히 구분하긴 어렵다. 듣기뿐만 아니라 말하기에도 나는 별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언젠가 한 번은 사투리를 쓰는 드라마 주인공의 대사 몇 줄을 따라 했는데 부산 출신 친구 한 명이 크게 비웃으며 “어디 가서 절대로 그거 하지 마라.” 하는 바람에 그 뒤로는 입도 뻥긋 않고 있다. 애초에 완벽히 하겠다는 자신감도 없었지만… 그녀의 눈빛에서 '친구라서 봐준다' 같은 뉘앙스를 읽었다고 해야 하나…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의 고충 역시 내가 전혀 모르는 영역이다. 친구 A는 대학 시절, 자신이 말 한마디만 해도 곧바로 '사투리 쓰는 애'로 특정 지어지는 것이 별로 유쾌하지 않아 말투를 바꾸게 되었다고 했다.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직업인 경우 아예 표준어를 구사할 것을 요구받기도 하고. 그래서인지 나의 대학 친구들 중 절반 이상은 더 이상 사투리를 쓰지 않지만, 고향 사람들과 있을 때는 여지없이 사투리가 튀어나오는 듯하다. 고향에서보다 서울에서 지낸 시간이 길어 스스로를 ‘가짜 경상도인’이라고 부르는 친구 B는 그 현상에 대해 다음과 같은 멋진 비유로 설명해 주었다. 외국에 오래 살며 그 나라의 언어만 쓰다가도 인천공항에 도착하면 자연스럽게 한국말을 하게 되는 것과 비슷한 거라고. 아하, 그러니까 머릿속에 일종의 사투리 출입국 심사장이 있단 말이지.


서울말과 사투리 그 중간 어딘가의 높낮이에서 곡예하듯 말하는 친구들을 보며 종종 귀엽다는 생각을 한 사실을 그들이 알게 된다면, 나의 어설픈 사투리를 들은 부산 친구처럼 차가운 눈빛을 하려나. 하지만 특색 없는 말투를 가진 사람으로서, 그것도 '아', '근데', '진짜'를 빼면 잠시동안 말문이 막히는 사람으로서, 난생처음 듣는 색다른 표현들을 툭툭 뱉어내는 사투리 네이티브들이 특별해 보이는 걸 어쩌랴. 같은 농담을 하더라도 사투리로 이야기해 주면 좀 더 맛깔스러운걸. “이거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예요?” 혹은 “e의 2승” 같은 걸 말해달라고 요청하고, “맞나”라는 추임새에 “맞지 그럼...?”이라고 대답하는 멋없는 서울사람을 너그러이 이해해 주는 친구들에게 감사 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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