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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Jan 31. 2024

코인노래방의 가수들


잘 못하는데도 자주 하게 되는 일이 있다. 바로 노래. 연습도 중요하겠지만 어느 정도는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는 특성이 사람을 좀 뻔뻔하게 만든다. 그래서 내가 노래를 못한다는 사실은 중국어를 못 한다는 사실보다 받아들이기가 훨씬 쉽다. 나 같은 사람이 노래방에 가기 위해 필요한 준비물은 실력보단 흥과 체력, 그리고 열린 마음 정도일 것이다. 열린 마음이란 취한 친구가 갑자기 슬픈 노래를 부르며 울거나 <첨밀밀>을 불러도 미소를 잃지 않고 박자를 타줄 수 있는, 그런 마음이다.


요즘 길에 코인 노래방이 많이 보인다. 오락실 안에 덩그러니 놓여 있던 노래방 부스가 코인 노래방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인데, 시간이 지나며 매장 수가 많아진 만큼 시설도 놀랄 만큼 좋아졌다. 발전한 코인 노래방은 내부가 아주 깨끗한 데다 혼자 가도 아무런 부담이 없어 동네에 하나쯤 있으면 반갑다. 학창 시절까지만 해도 노래방이란 차분히 노래를 부르는 곳이라기보단 춤 70%, 노래 10%, 숨소리 30%로 도합 110%의 광기를 발산하는 공간이었는데, 혼자 가는 코인노래방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서정적인 발라드를 얼마든지 불러도 된다. 일어나서 춤추지 않는다고 해서 따가운 눈초리가 날아와 꽂히는 일도 없다. 여럿이 놀 때처럼 역동적이진 못한 대신 나만의 공간에 있는 듯 아늑한 매력이 있다.


모처럼 약속이 없던 금요일. 단골 국밥집에서 혼자 소주 반 병을 마시고 코인 노래방에 가서 발라드를 불렀다. 청승떨기 정석 코스지만 그 누구와도 이별은 안 한 상태였다. 우울하지도 않았고 고민거리도 없었다. 사실 이것을 뛰어넘는 각종 청승은 이미 대학 시절에 종류별로 떨어봤으니 굳이 아쉽지도 않았다. 대신에 나는 뭐랄까, 좀 시원해지고 싶었던 것 같다. 삐걱삐걱 돌아가는 직장인의 일상에는 큰 소리로 말하거나 소리 지를 일이 많지 않으니까. 사무실에서도, 집에서도, 지하철에서도, 카페에서도, 헬스장에서도, 술자리에서도. 그렇게 풍경처럼 조용히 살다 보니 차마 뱉지 못한 감정과 소리들이 내 안에서 한 데 엉켜 있는 기분이었다. 이럴 때는 뱉어내야지. 음정이 하나도 안 맞더라도.


내 발라드 지식은 이젠 거의 노래방 고전의 반열에 오른듯한 곡들에서 업데이트가 멈췄다. 감수성이 풍부했던 중학생 시절에 발라드 곡을 가장 열심히 들었고 성인이 된 이후에는 음악 취향이 만두피처럼 넓고 얕아졌기 때문이다. 성시경과 버즈, 윤하, 그리고 토이로 이어지는 선곡표를 열창한 뒤 문득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어져 보아의 <넘버원>과 다이나믹 듀오 메들리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반전을 주고, 마무리는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혼자라 부끄러울 것도 없으니 최대한 맛깔나게.


나의 mp3 역사를 훑는 콘서트 대장정을 진행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데, 옆방에 막 들어온 또 다른 가수의 목소리가 벽을 훅 뚫고 들어왔다. 폐를 토해낼 것만 같이 빠르고 강렬한 랩이었다. 세상에 불만이 많은 래퍼 앞에서는 문과 벽도 소용이 없는 듯, 그의 뜨거운 열정이 담긴 가사가 내 귀에 팍팍 꽂혔다. 아니, 이렇게 잘 들릴 거면 그냥 같은 방에서 불러도 되는 거 아닌가. 내 목소리도 저렇게 들리는 거라면 좀 부끄럽긴 하네… 성량을 조금 줄이려다가 이내 마음을 고쳐 먹는다. 코인노래방 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우리 마치 서로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처럼 행동하기로 해요’라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으므로. 그렇게 옆방의 아웃사이더와 이 방의 심수봉은 각자의 단독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끝내는 데에만 집중했다. 어쩌다 타이밍이 겹쳐 동시에 방을 나서게 되더라도 서로를 있는 힘껏 모른 척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코인 노래방의 매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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