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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Jan 03. 2024

별점 4.5점을 많이 남기는 사람


영화를 보고 나면 반드시 별점을 기록한다. 그러나 별점만 냅다 매겨놓을 뿐 한 줄 후기조차 쓰지 않기 때문에 나중에 기록을 찾아보더라도 별 도움은 안 된다. 별점은 높은데 왜 그렇게 감명 깊게 봤는지 짐작이 안 되는 경우도 많고, 별점이 아주 야박한 영화도 기억이 미화되어 ‘그렇게 나쁘진 않았던 것 같은데… 왜 1점밖에 안 줬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의 영화 기록 어플에는 그 이외에도 특이한 점이 하나 있다. 바로 별점 4.5점대에 분포해 있는 영화가 눈에 띌 정도로 많다는 것.


옷, 인테리어, 음식이나 인간관계 등에 있어서는 나름 취향이 뚜렷한 편인데 유독 창작물을 볼 때만 관대해진다. 백이면 백 고개를 가로저을 괴작이 아니고서야 '엔간히' 재밌으면 후한 평점을 부여한다. "전체적인 스토리나 배우 연기는 좀 별로였는데 그래도 이 부분의 대사는 정말 심금을 울렸어…" 같은 식이다. 태생적으로 시야가 좁은 사람이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나는 이걸 관대함으로 포장해서 부르기로 했다. 영화에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책을 읽을 때도, 음악을 들을 때도, 예능이나 유튜브를 볼 때도 거의 모든 걸 재밌어한다. 5점이 아닌 4.5점을 주는 건 마지막 자존심이다. 별 다섯 개는 배달 어플에만 남긴다.


사실은 이것이 크나큰 결점이라고 생각한 때도 있었다. 모든 걸 재미있어한다는 말을 비뚤게 해석하면 결국 취향이 뾰족하지 않다는 뜻도 되니까. "어떤 영화 좋아하세요?" 혹은 "어떤 책 좋아하세요?" 같은 물음에 "어…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는데요."라고 대답하는 게 한때는 좀 멋없게 느껴졌다. 나도 "땡땡 감독의 땡땡 작품 같은 액션 영화 좋아해요." 혹은 "무라카미 하루키를 즐겨 읽습니다." 같은 대답을 하고 싶은데. 미술을 전공한 데다 회사에서도 콘텐츠를 가까이하는 직무를 맡고 있는지라, 스스로가 이렇게나 두루뭉술한 사람이라는 게 무슨 자격 미달인 것만 같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젠 성격이 좀 뻔뻔해져서인지, 어차피 나는 이 세상의 훌륭한 책과 영화들을 다 못 보고 죽을 가능성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아서인지, 더 이상 예술적 취향을 뾰족하게 갈고닦아야 한다거나 하는 압박감은 느끼지 않는다. 다 좋은데 뭐 어쩌라고. 그만큼 즐길 수 있는 콘텐츠가 많으니 얼마나 축복받은 인생이냐.


이쯤에서 소름 돋는 사실을 하나 고백하자면, 사실 나는 내가 쓴 글도 아주 재미있게 읽는다. 위대한 작가들의 전기를 들여다보면 자신의 결과물이 성에 차지 않아서 삶을 파멸까지 몰고갈만큼 드라마틱한 인물들도 많은데. 내가 즐겨 읽고 동경하는 동시대의 작가님들도 항상 본인의 책을 소개하며 "부끄러운 결과물" 이라거나 "부족한 작가" 같은 말들을 습관적으로 사용하시는데. 실상 아무것도 아닌 나는 지금 "무료할 때 제 글을 종종 읽습니다. 아주 재밌어요. 순전히 제 취향으로 쓰였거든요."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상당히 비호감이다.


우습게도 바로 그 점이 내가 글을 계속 쓰게 만드는 원동력이 된다. 읽어주는 사람이 없어도 별 타격이 없다. 내가 읽으면 되니까. 내 글을 재미있게 읽는다고 해서 내 글이 가장 낫다는 뜻이 (당연히!) 아니다. 다른 사람의 훌륭한 글을 읽다가 끝도 없이 부끄러워지는 때가 하루에 대략 삼백 번 정도 있고, 그들을 따라 하고 싶은 비뚤어진 욕망에 이글거리는 순간은 오백 번 정도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글이 싫어지지는 않는다. 그뿐인 것이다. 글을 쓰고, 만족하고, 다른 이의 글을 읽고, 절망하고, 질투하고, 좀 더 나아졌길 바라며 다시 글을 쓰고, 만족하고… 그것이 나의 별 볼 일 없는 '읽고 쓰는 삶'이다.


남들의 결과물엔 매정하고 내 결과물엔 관대하거나, 남들의 결과물엔 관대하고 내 결과물에만 매정하면 문제가 생길 가능성이 좀 있다. 전자라면 발전이 없고, 후자라면 발전 속도가 빠르겠지만 마음이 힘들다. 하지만 둘 모두에게 관대하다면? 세상은 즐길거리가 너무나도 많은 곳이다. 무엇을 봐도, 어떤 일을 해도 기뻐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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