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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Nov 22. 2023

한강 야경이 맥주 안주


친구들과 술 한잔, 아니 여러 잔을 걸치고 귀가하는 길. 버스를 타고 한강 공원 근처를 지나다가 충동적으로 하차 벨을 눌렀다. 적당히 오른 취기, 시원한 초겨울 날씨, 그리고 반짝이는 한강의 야경.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상황, 낭만 챙기기도 딱 좋은 상황. 나는 두 가지를 모두 챙기기로 결심하고 아무 계단에 걸터앉아 캔맥주를 땄다. (지금 이 글은 기침을 하며 쓰고 있다.)


한강 혼맥 정도야 취업준비생 시절부터 즐겨 오던 취미생활이기에 새삼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이어폰을 끼고 감성적인 플레이리스트를 재생한 뒤 풍경의 일부가 된 사람들을 구경했다. 11월인데도 날씨는 이상하리만치 포근했으나, 밤이 되자 제법 초겨울다운 쌀쌀한 공기가 볼에 와닿았다. 어떤 사람들은 담요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꿋꿋이 치킨을 먹고 있었다. 나도 한강 피크닉을 좋아하긴 하지만, 사실 여기서 돗자리를 깔고 음식을 먹는 건 맛의 측면에서 좋은 선택은 아니다. 차디찬 강바람에 음식이 매우 빠른 속도로 식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운 와중에 담요를 뒤집어쓰고서라도 음식을 먹고 맥주를 마시게 하는 게 바로 한강 야경이 사람들에게 거는 마법이다.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돌리자 요즘 유행하는 댄스 영상을 찍는 학생들이 보였다. 대단한 열정이군. 지금 내가 저 동작을 했다가는 발목이 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들의 발목이 오래오래 튼튼하기를… 다시 한 모금. 남자의 것으로 보이는 외투가 여자의 어깨에 걸쳐져 있고, 둘 다 예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걷고 있지만 손은 안 잡고 있다. 썸 타는 중이로구나! 행복하세요! 또 한 모금. 한 쌍의 커플이 꽤나 심각한 얼굴로 싸우더니 결국 각자 다른 방향으로 사라져 버렸다. 뭐지, 나 방금 앉은자리에서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본 것 같은데. 당황하며 한 모금 더. 코를 박으면 갓 쪄낸 고구마 냄새가 날 것만 같은 갈색 강아지 발견. 지금 이 순간 나는 저 강아지의 주인이 미치도록 부러울 뿐이다…


외투 속까지 한기가 스며들 무렵 맥주도 때맞춰 바닥을 보였다. 여기서 한 캔을 더 까면 진짜 변사체로 발견될지도 모른다. 수많은 음주 경험을 통해 쌓은 지혜로 미련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꽤 늦은 시간이었는데도 한강공원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따뜻하고, 좋은 음악도 나오고, 편한 화장실도 있는 술집을 다 놔두고 초겨울 강바람마저 기꺼이 견디게 만드는 이곳의 매력은 대체 뭘까.


아마도 한강의 야경에는 사람 냄새가 묻어 있기 때문이 아닐까. 비록 지금 하늘도 물도 나무도 깜깜하지만 우리는 여기에 있어, 그러니 안심해. 사람들이 모여 만드는 불빛의 반짝임은 그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평소라면 부끄러워 쉽게 꺼내 보이지 못했을 무수한 감정들을 한강은 아무렇지도 않게 허락한다. 이제 막 싹트는 중인 연인들의 사랑은 더 깊어지고 (반대의 경우도 있긴 하지만...), 고민 많은 사람은 그저 반짝이는 강물에 생각을 하나둘 흘려보내다 보면 마음이 잎사귀처럼 가벼워진다. 다음번에도 이 모습 그대로 있어줄 것을 믿기에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날 때도 하나도 아쉽지 않은 곳. 더위를 싫어하는 내가 내년 여름을 기대한다면, 그건 바로 한강의 야경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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