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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삭 Feb 21. 2024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스마트폰이 없었을 때는 촬영된 자기 모습을 보는 일이 일상적이지 않았고 셔터를 누를 기회도 훨씬 적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매번 사진을 찍을 때마다 나름대로의 최선을 다했다. ‘치즈’나 ‘김치’를 외치며 다소 경직된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 번쩍 기록되는 소중한 순간들의 모양은 며칠 혹은 몇 달 뒤에야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정성껏 만들어진 한 장의 사진은 대체로 가족이나 친구처럼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끼리만 돌려 볼 수 있는 거였다.


상황은 급변했다. 2024년을 살아가며 자기 얼굴을 카메라로 찍어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인터넷이,스마트폰이, SNS가 있는 세상에선 하루에도 수백 장의 이미지와 영상을 주고받을 수 있다. 가끔은 어딘가에 올리지 않을 거라면 굳이 사진을 찍을 필요가 있나? 하는 지극히 현대인다운 생각을 하기도 한다. 사진은 더 이상 물리적으로 가까운 사람끼리만 특별히 공유할 수 있는 물건의 개념이라기보다, 항상 곁에 있지만 손으로 만질 순 없는 데이터에 가깝다. 수정과 삭제가 쉬운 디지털 이미지는 내게 인화된 사진만큼의 중요도를 갖지 않는 것 같다. 촬영된 내 얼굴을 보고 예전만큼 신기하거나 낯선 기분이 들지도 않는다.


그렇게 급변한 상황 속에서도 예외는 있다. 바로 TV.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로 시작하는 동요를 부르며 시청률 50%가 넘는 TV 드라마를 시청하던 세대에게도, 시청률보다는 유튜브 구독자 수로 인기를 가늠하는 게 편한 요즘 세대에게도, TV에 본인의 얼굴이 나온다는 건 예삿일이 아니다. ‘TV에 나오는 사람’이란 여전히 유명한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과 일정 부분 동일시된다. 아무리 유튜브가 TV보다 파급력이 크고 일반인이 등장하는 콘텐츠가 쏟아져 나온다고 해도, 우연이나마 TV 화면에 노출되었다는 건 특별하고 재미있는 이벤트다. (불미스러운 일로 9시 뉴스에 등장하는 게 아니고서야 보통은 그렇다.)


며칠 전 저녁, 나는 TV로 축구 중계방송을 보고 있었다. 경기가 잘 안 풀려서 영 지루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중계 카메라가 유니폼을 맞춰 입고 태극기를 두른 관객 서너 명을 화면에 비추었다. 다소 지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던 그들은 카메라가 본인들을 찍고 있다는 걸 알아채자마자 환한 웃음을 지으며 신나게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지치고 실망한 표정에서 완벽한 설렘과 신남의 표정으로 바뀌기까지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다. 중계를 보던 나도 그 모습을 보며 덩달아 기분이 좋아질 만큼.


화려한 응원 복장과 연령대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그들은 경기 시작 전 자신들의 모습을 찍어 SNS에도 업로드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SNS 피드에 올라온 모습이나 중계 카메라에 비추어진 모습이나 같은 시공간을 기록한 동영상일 뿐 엄밀히 말해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커다란 TV 화면에 모습을 비추는 일은 그 당사자에겐 SNS 피드의 게시물과는 차원이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십몇 년 전에 <여섯 시 내 고향>에 출연한 나의 친척은 명절이면 여전히 식구들 입에 오르내린다. 스포츠 경기를 응원하러 갔다가 뉴스 자료화면에 등장한 내 친구는 방송 화면을 캡처해 자랑스럽게 SNS에 업로드했다. 다른 친구는 (지금보다 상당히 더 귀여웠던) 어린 시절 EBS 어린이 방송에 출연했던 사실을 비밀 얘기처럼 해 주곤 한다. 나는 이런 것이 TV 방송의 소소하고 귀여운 순기능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에 이야깃거리를 던져주고,  '텔레비전에 내가 나왔으면 정말 좋겠네, 춤추고 노래하는 예쁜 내 얼굴...' 노래하던 그 시절로 잠시간 돌아가게 해 주지 않는가. 각종 미디어에서 뱉어내는 소식들이 모두 쓸모 있는 것은 아닐지라도, 그걸 통해 얻을 수 있는 작은 즐거움까지 쓸모없는 것으로 치부하는 건 조금 섭섭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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