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응변 : 신사임당의 포도 그림
우리가 손댈 수 없는 부분을 외주 공사로 맡기게 되니 다른 일을 할 여력이 생겼다. 언제 이런 일을 또 하게 될까 싶어(다신 셀프 인테리어는 안 하는 걸로 마음 굳힌 상태) 공사하는 모든 과정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일정이 빠듯해서 그러지는 못했다. 대신 공사가 끝날 때마다 A와 나는 꼼꼼하게 검사했고 미비점이 나오면 지적해서 개선하도록 했다. 아무튼 미장 작업은 우리가 따로 신경 쓸 건 없었기 때문에 그 시간 동안 필요한 물품을 사러 인근 도시로 나섰다.
내가 있는 곳은 서울과는 한참 떨어진 경상도이기 때문에 서울 황학동까지 갈 수는 없었다. 그래서 부산, 대구 위주로 주방용품과 설비를 알아보러 다녔다. 가서 그냥 보고만 나온다면 다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에 사고 싶은 것들이나 예쁜 그릇 같은 것들은 직원 허락을 받고 사진을 찍었다. 어느 곳에 가든 손님이 별로 없을 때 가니까 직원분이 내 옆에 밀착해서 판매 가격과 에누리 가격 정보 모두를 알려주셨다. 나는 그때 필요한 집기류와 물품 리스트를 작성한 출력물을 가지고 다니면서 견적 비교를 했다. 당연히 인터넷 쇼핑몰에서 파는 제품 가격도 정리한 게 있어서 그 자리에서 가격 비교를 하며 흥정을 했다. 정말 재미있었던 건, 다음 매장을 방문할수록 가격이 더 저렴해졌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렇게 발품을 팔아서 주방 설비는 김해에서, 주방용품과 집기류는 마지막으로 방문한 대구의 한 매장에서 구매를 했다. 어느 곳이든 인터넷보다 더 저렴했고 거기서 추가로 네고까지 가능했다. 구매 결정 후, 각 매장마다 계약금을 건네고 물품을 배송받기 위한 날짜를 정해야 했는데 당시에 바닥 방수 페인트 작업을 시작하기 전이라 언제 배송을 받아야 될지 애매했다. 그래서 넉넉잡아 페인트 작업이 끝나고 일주일 뒤에 받기로 약속했다. 일주일이면 다 마르고도 남을 시간이라 예상했다.
그때 우리는 페인트 가게 사장님 말만 철석같이 믿고, 못해도 3일이면 바닥이 다 마를 것이라 여겨 스케줄을 짠 거였다. 그런데 3일째가 지나고 4일, 5일, 6일이 지나도 마를 기미가 안 보이는 것이다. 페인트 배합에 문제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생각해보면 하필 겨울 중에서 가장 추울 때라서 건조가 잘 안됐던 것 같았다. 그렇게 춥고 건조한 1월의 날씨만큼 내 속은 바삭하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아직 바닥이 마르지 않아서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어느 정도 건조가 됐는지 보려고 창문 틈으로 나무 막대기를 바닥에 쿡쿡 찔러봤지만 속절없이 누른 만큼 파여버리는 가게 바닥만 넋 놓고 바라보는 게 다였다.
결국 바닥 방수 페인트가 채 마르기도 전에 주문해둔 주방설비를 설치하러 오는 사단이 벌어졌다.
아, 어쩌지...
모르겠다. 일단 받았다. 약속한 날에 배송이 와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업소용 냉장고라든지 화구를 주방에 들여놓으면서 바닥은 수많은 생채기를 양산했다. 조금이라도 피해를 줄이고자 바닥에 종이 박스를 깔았더니 마르지 않은 바닥이랑 종이 박스가 붙어버리는 일도 발생했다. 설상가상이었던 셈이다. 우여곡절 끝에 주방설비 설치를 끝내고 가게 바닥을 바라보니 마치 여드름 자국으로 얼룩진 사춘기 시절 내 얼굴을 보는 듯했다. 정말이지 눈물이 앞을 가리는 상황이었다. 그렇게 멍하게 바닥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친구 A의 직업이 화가라는 게 생각이 났다. 나는 A에게 그라인더를 손에 쥐어 주었다.
"바닥에 세계지도 한번 그려보자."
이런 말도 안 되는 내 부탁을 친구는 진지하게 들어주었다. 바닥에 패인 부분끼리 그라인더로 갈아서 세계지도같이 한 번 그려보자고 했는데 진짜로 하는 것이었다. 작업 결과는 의도와는 달리 그다지 세계지도 같이 생기진 않았지만 바닥이 생각보다 자연스럽게 패턴이 나와서 의외로 마음에 들었다. 신사임당의 어렸을 적 일화였던 치마폭 포도 그림처럼 된 거라 자기 위안을 삼았다.
가게에 주방설비와 집기류가 들어오고 나서 제법 가게다운 모습 같아 보이기 시작했다.
다음 회차에는 파란만장했던 메뉴 개발 과정이 그려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