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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돋을볕 Dec 15. 2022

빵점 기념 짜장면 파티

어리다고 왜 힘듦을 모르겠는가

다른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 게 보이기 시작했다면 그는 주인공이다. 내 자아의 빈 부분을 발견하기 시작했다면 그는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것이 가장 아프게 하므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내가 얼마나 인내심이 없는지, 누군가를 온전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게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를 알아간다. 아이들은 텅 빈 강정처럼 내가 속이 빈 사람임을 깨닫게 해 준다. 매일 고민하지만, 매번 실수하고 자주 후회한다.

     

  첫 아이는 아홉 살 인생을 살고 있다. 만으로 치자면 나와 만난 지 여덟 해다. 이 아이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 나의 기쁨이자 숙제다. 우리 집에서 가장 책을 많이 읽고 무엇이든 스스로 만드는 걸 좋아하며 감수성이 풍부하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끔 비타민이나 캐러멜 등을 하나씩 주실 때가 있는데 동생이 좋아할 생각에 먹지도 않고 아껴서 집에 가지고 온다. 무엇보다 엄마의 말을 철석같이 믿는데, 가끔 내가 너무 화가 나서 극단적으로 말할 때도 매달리거나 사정하지 않고 “네, 알겠어요.”하며 눈물을 훔친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도 다른 사람 몫을 꼭 남겨두고, 모자랄 때는 자신이 참고 양보한다. 좋아하는 물건을 사줄 테니 고르라고 하면 가격을 보고 가장 싼 것을 집는다. 이 아이는 나와 남편을 닮았지만, 우리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다. 지구별에서 만난 반짝이는 선물이다.

    

  요즘 초등학교 2학년은 학기에 한 번씩 수행평가가 있다. 국어는 평소에 책을 많이 읽어서 따로 신경 쓰지 않는데, 수학은 주의를 기울인다. 따로 선행을 하지는 않지만, 지금 시기에 쌓아 놓아야 할 기초는 튼튼히 하고 가려고 한다. 이번 평가는 구구단을 이용한 곱셈과 시간과 시각, 날짜를 계산하는 범위였다. 아직은 쉬운 단계라 별문제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이가 찢어진 달력을 보고 날짜를 계산하는 부분에서 헤매는 것을 알았다. 아이를 앉혀놓고 처음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각 달이 며칠 인지와 어떻게 계산하는 것인지 가르치다가 슬슬 부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아이는 점점 눈이 빨개졌고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고 긴 속눈썹을 크게 치켜뜨고 이마에 힘을 주었다. 아이의 표정, 숨소리, 불편한 자세와 연필을 잡은 손가락까지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기에 더 답답하고 화가 났다. 결국 아이는 눈물을 흘렸다. 닭똥 같은 눈물이 보송한 솜털 위로 또르르 굴렀다. 그리고 내 마음도 무너져 내렸다. 이게 뭐라고 화를 내는가, 공부 잘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면서 하나도 괜찮지 않은 이 태도는 도대체 무엇인가 부끄러웠다. 아이는 조심스레 말했다.     

  “엄마가 말은 부드러운데 눈은 이렇게 세모나게 떠서 어떤 게 진짠지 모르겠어. 헷갈려.”


  아이는 내 눈에서 진실을 보았다. 당장 내일이 시험인데 조바심 나고 안달 내면서 다 맞길 바라는 내 욕심을 읽었다. 눈에 힘을 풀고 아이에게 속마음을 전했다.     

  “네 말대로 엄마가 그랬네. 평가를 보는 건 너고, 시험이라는 말 자체가 스트레스고 하기 싫은 일일 텐데 무섭게 대해서 미안해. 사실 엄마도 어렸을 때 시험 보는 게 너무 싫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을 정도였어. 찢어진 달력 문제도 진짜 싫어했어. 누가 달력을 찢은 거야, 대체.”

누가 자꾸 달력을 찢는가.

  아이는 의자에서 일어나 책상 맞은편에 앉은 내게 다가와 안겼다. 마음을 알아주고 이해해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는 힘을 얻고 얼었던 가슴을 녹였다. 언제나 회생할 기회를 다시 주는 건 아이다. 나는 또다시 후회하며 아이가 원하는 부분까지만 하고, 다하고 나면 소원 한 개를 들어주겠다고 했다. 내일 몇 점을 맞든 상관없이 네가 먹고 싶은 음식으로 저녁에 파티를 하자고 했다. 아이는 “70점 맞아도? 50점 맞아도? 빵 점 맞아도?” 하며 물었다. 나는 진심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점수에 상관없이 시험을 견뎌낸 너를 위한 파티야.” 하고 대답했다. 아이는 “빵점을 맞아도 먹는다니. 빵점 기념 파티네.” 하며 깔깔거렸다. 별처럼 눈을 반짝이며 결국 끝까지 다 해냈고 문제를 이해했다.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한 소원권에는 싱긋 웃으며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오늘 밤엔 엄마랑 같이 잘래. 오늘은 동생이 아빠랑 자라고 하자.”     


  다음 날 수행평가를 마치고 돌아온 아이는 다행히 표정이 맑았다. 행동은 경쾌하고 간식을 찾는 손길은 가벼웠다. 조심스러워 묻지도 않고 가방 정리를 돕는데, 옆에 와서 오늘 시험이 생각보다 쉬웠다고 콧노래를 부른다. 점수는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기 싫지만 해야만 하는 일, 어렵지만 밟고 지나가야만 하는 일을 해낸 아이가 대견스러웠다. 저녁엔 약속대로 아이의 주문을 받아 짜장면 파티를 벌였다.

    


  따뜻한 짜장면 한 그릇이 아이의 영혼을 밝힌다. 겨우 칠천 원짜리 짜장면 하나로 아이는 세상을 다 가졌다. 마음을 데워야 하는 게 어디 아이뿐일까. 어릴 땐 쏜 화살처럼 쉼 없이 다가오는 시험이 문제였다면, 이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어디에서 올지 모를 숱한 고난 속에 살아간다. 지각 변동같이 거대한 충격부터 끝나지 않는 긴긴밤 같은 날들, 몸을 사로잡는 질병과 때로는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 일상까지 우리를 삼키려 든다.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영국 작가인 로리스 레싱은 책을 읽고 글을 쓴 것은 불행한 삶에서 벗어나려던 것이었다고 고백한다. 대표작 『19호실로 가다』는 주인공 ‘수전’이 자신을 옥죄는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해 ‘19호실’이라는 자신만의 공간으로 향하는 이야기이다. 그곳에서 수전은 잠을 자고 휴식을 취하며 자기 인생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모든 사람에겐 숨 쉴 틈이 필요하다. 맛있는 음식이든, 혼자만의 시간이든, 열정을 불태울 경험이든 한 뼘의 충전이 방전된 자신을 살린다.      


  정해진 커리큘럼대로 인생을 살아온 현대인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조차 잘 모른다고 한다. 타인의 기준과 인정에 맞춰 살다 보니 선호의 기준이 자신에게서 벗어난 것이다. 아이는 보호자의 도움을 받으면 되지만, 이미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는 어떻게 충전기를 찾을 수 있을까? 길을 찾기 위해선 길을 잃어야 한다. 단단히 굳어버린 부정의 얼음 장벽을 깨고 들판으로 나가야 한다. 안 되는 이유를 찾지 말고 하고 싶은 무엇을 마음속에서 길어 올려야 한다. 내가 내 편이 되어 다독이고 응원하면 나를 위로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지금 머릿속에 떠오르는 ‘그것’이 나를 위한 파티 재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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