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나는, 그 말이 점점 비극처럼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변할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누구에게나 한 번쯤은 마음에 머물다 간다. 나도 예전엔 “사람은 안 변해”라는 말을 자주 했다. 누군가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본 후, 그 말 한마디로 모든 걸 정리했고, 나 자신에게조차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단정 짓고 싶었던 것 같다. 어차피 안 바뀌니까, 기대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말이 간편해서, 그 말에 기대어 버텼다. 그러는 게 더 편했으니까.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말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정말이지 바뀌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사람이 아주 오랜 시간 끝에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직접 본 적이 있었다. 매일을 한량처럼 놀던 사람이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1년에 몇 개씩 자격증을 따고, 마침내 근사한 직장까지 들어가는 걸 보았다. 그 장면은 단순한 변화 이상이었다. 내 믿음에 조용히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사람은 진짜, 바뀔 수 있는 존재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어느 순간, “사람은 안 변해”라는 말이 이상하리만치 비극적으로 느껴졌다. 그 문장은 마치 더 이상 나아질 수 없고, 더 이상 성장할 수 없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돌아보고, 채워가는 것을 삶의 소명처럼 여겨온 나로서는, 그 말이 내 삶을 부정하는 문장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요즘은 그 말을 잘 쓰지 않게 되었다. 그보단 아직 남아 있는 가능성에 기대고 싶은 쪽이다.
물론 지금도 나는 인간의 ‘기질’이라는 건 쉽게 바뀌지 않는다고 믿는다. 성향이란 건 태어날 때부터 어느 정도 정해져 있고, 그건 마치 삶의 바닥에 깔린 리듬처럼 어떤 상황에서도 비슷한 반응을 끌어올린다. 말투, 표정, 화를 낼 때의 방식, 익숙한 생각의 회로 같은 것들. 그런 것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어쩌면 평생을 데리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믿는다. 기질은 바꾸기 어려워도 태도는 달라질 수 있다고. 습관은 고쳐질 수 있고, 감정을 다루는 방식은 서서히 익혀갈 수 있다고. 그러니까 ‘사람은 안 변해’라는 말은 언제나 옳다고 하긴 어렵다. 단지 시간이 많이 걸리고,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고, 스스로 바뀌고 싶다는 선명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이 붙을 뿐이다.
물체에 관성이 있듯 사람의 사고에도 관성이 있다. 익숙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익숙한 방식으로 반응한다. 변화는 그 관성을 이겨내야 하는 일이다. 당연히 쉽지 않다. 어떤 사람은 결국 그 관성 속에서 평생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래서 세상에는 정말 바뀌지 않는 사람도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고 싶다.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다 해도, 변할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모든 사람 안에는 바뀔 수 있는 여지가 있다. 그 가능성이 닫혀 있는 것처럼 보여도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다만 그 문을 여는 열쇠가 본인 안에 있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 삶의 태도, 따뜻한 시선 같은 게 어느 순간 조용히 닫힌 문을 건드릴 수도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대부분 ‘사람’을 통해 열린다. 우리가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습관 하나가 바뀌고, 말투가 부드러워지고, 감정을 내는 방식이 조금씩 달라진다. 억지로 애쓰지 않아도, 닮고 싶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우리는 저도 모르게 달라지기 시작한다.
돌아보면,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던 시절엔 늘 차분한 친구가 곁에 있었고, 산책을 좋아하게 됐을 땐 걷는 삶을 즐기던 사람이 내 옆에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것도, 조용히 읽고 쓰는 사람을 가까이 두면서부터였다. 나는 늘 누군가의 온기를 통해 내 안에 미처 몰랐던 가능성을 발견하곤 했다. 그렇게 사람을 통해 조금씩 다듬어지면서도 여전히 '나'였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단정 짓지 않는다. ‘사람은 안 바뀌어’라는 말은 어쩌면 단정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문장이다. 그 말 뒤엔 늘 피로가 묻어 있다. 지쳤고, 기대하지 않겠다는 마음.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정말로 안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또 바뀔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조금씩, 조금 더 나은 쪽으로 움직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슴속에 품고 살아간다. 그것이 삶의 여지다. 그리고 의지가 있을 때 그걸 믿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 사람은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조심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