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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AN Nov 14. 2021

도망쳐도 괜찮아

2020년 하반기, 반년을 놀았다. 놀았다기보다는 내가 밥 벌어먹던 유일한 수단인 주방일을 그만두고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가야 하나 고민하며 고군분투했다가 더 알맞다. 사실 놀았다고 하기에 반년 동안 수익이나 뚜렷한 결과는 없었지만, 타인의 채찍질이나 의지 없이 혼자 치열하게 살았다.


반년 동안 스타트업을 해보겠다고 이리저리 치이고 부딪혀도 봤지만 어쩌다 보니 작은 온라인 서점 사장이 되었다. 매출은 미미하나 남이 주는 일이 아닌 내가 나에게 주는 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 뿌듯했다. 인력을 고용할 수 없는 상황이라 독학으로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을 하게 되었고 운 좋게도 이것저것 만들며 로고 및 명함, 스티커, 간판 등등 디자인 의뢰를 받게 되어 소소하게 용돈 벌이를 하게 되었다. 과거의 직업 덕분에 푸드스타일리스트 겸 손 모델, 프리랜서로도 일하며 지냈고 굉장히 바쁘면서도 바쁘지 않은 일상을 살아갔던 반년이었다.


하지만 내 삶은 반년이라는 시간 동안 무채색에 가까웠다. 딱히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어떠한 행동이나 구매 혹은 취미 따위의 하고 싶은 것이 아닌 내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일이 없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 동안, 나는 때가 탄 빛 바랜 캔버스가 되었다. 참 세상을 모르고 철딱서니 없던 아이는 열심히 부딪혔지만, 점점 세상에 갈리고 깎이며 군데군데 상처가 났다. 그리고 벽을 인정하고 유턴을 하며  합리화하고 있는 사람이 되어갔다. 다른 시야에서 바라본다면 좋은 면도 있지만 결국 현재 나의 세상은 회색빛이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21년에는 운이 좋게도 나의 전공이 아닌 과거 학창 시절, 나의 준거집단이었던 미대로 대학원을 가게 되었다. 사실 대학원 진학이라는 명분으로 "손목도 망가져 칼질도 아파서 못하고, 일을 시작하기도 어려우니까, 지금 들어가면 그 스케줄을 어느 회사가 맞춰줘?"라며 본격적인 생산활동을 피해왔다. 내가 나에게 상처를 줬고 "나이 먹고 뭐 하는 거야? 주변 사람들은 다들 번듯이 회사 잘 다니는데 너는 지금 뭐 하는 건데?"라고 자신을 타박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야 그래도 난 일찍 일해서 경력직이잖아. 괜찮아 쉬어간다고 생각하자"라며 위안도 해봤다. 결국 자신의 자기합리화 및 심리적 자학이 더욱 조울증과 공황 장애를 악화시켰고 낯선 곳, 낯선 사람을 만나면 숨쉬기가 힘들어 피하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현실과 내가 분리된 느낌을 종종 느끼고는 했다. 그런 느낌이 심해진 어느 날 나도 모르게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나 친구를 만나며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지하철에서 숨이 막히며 귀가 안 들리기 시작했고 눈앞에 하얀 점들이 가득했다. 곧 내 시야는 암전. 내 머리는 지하철 통로 바닥으로 곤두박쳤다. 눈 떠보니 빛바랜 누런 플라스틱 천장과 땀에 푹 젖어버린 내 옷과 차갑게 식은 체온, 바들바들 떨며 현실을 인지하려 노력하는 나를 퀭한 눈동자로 바라보는 역무원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나에게 요즘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 아직은 정해지지 않은 목표지만 어떠한 목표가 생겼다. 나의 세상이 회색에서 조금은 나온 듯 "나 아직 살아있구나."라는 생각이 내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과거, 스무 살의 나는 하고 싶은 일보다는 잘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 생각은 찬찬히 돌이켜보면 5년 전, 원하는 미대 진학에 실패 후 도망치며 자기합리화했던 말이다. 후회는 하지 않는다. 도망치는 것은 남들에게는 다소 부끄러운 일로 비치지만 때로는 진통제가 된다. 도망칠 용기가 있는 사람은 도망을 가도 잠시 숨 좀 고르다가 도망쳐온 길을 돌아본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나의 잘못과 아쉬운 점을 찾아내 마음껏 아파하고 슬퍼하고 화도 내보다가 곧 털어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그런 도망들이 쌓여 보다 나은 내가 된다. 도망쳐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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