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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AN Nov 14. 2021

사람이 상황을 만드는걸까,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걸까.

2년 전이다. 호텔과 프랜차이즈, 개인 레스토랑, 푸드 디렉터 스튜디오를 지나 다시 주방의 열기와 그 안에서 일어나는 소리가 그리워 다시 돌아간 곳이 하필이면 파인다이닝이었다. 파인다이닝은 당시의 나에게 미지의 세계였다. 대학생 때 파인다이닝을 가고 싶다던 동기 언니는 프랜차이즈에서 캡틴을 달고 현실과 타협하며 살아가는데 그런 삶을 바라던 나는 정작 파인다이닝에서 셰프라 불리고 있었다. 사실 파인다이닝인지 알고 들어간 것은 아니었고 퍼스트 매장이 파인다이닝인 세컨드 매장이었다. 그러나 똑같은 오너셰프 밑이니 다이닝이라고 쓰고 파인다이닝이라 읽는 일명 "빡센" 곳이었다.


입사 당시, 내게 우선순위는 현재 말하는 소위 '워라밸'이었는데 그때까지만 해도 나에게 '일과 삶의 균형'이란 주2일 휴무와 적당한 월급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 워라밸이긴 했지만, 더 워스트 라이프 밸런스였다. 폭언과 인격모독은 기본이었고 오너셰프의 가스라이팅으로 인해 스스로를 절벽 끝으로 몰아세웠다. 사람이 자꾸 도망가니 버티고 있던 나에게 직급이라시며 모든 책임감과 욕을 떠넘겼고 또 그게 어떤 성취감과 더불어 내가 20대 초반 나이에 인자치라는 우쭐함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동시에 무시당하면 안 된다는 강박감과 물밀듯 밀려오는 나이 많은 후임들 그리고 도망가는 사람들, 제대로 되지 않은 인수인계와 인간관계에서 오는 트러블 사이에서 내 감정조차 제어하지 못했던 나는 어느새 아래에 두 명, 세 명 정도의 버티고 남은 후임들이 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나를 보는 그들과도 끊임없이 서로의 감정들이 어지럽게 늘어놓여있었다.


9 am - 10 am 출근하면 기본 1 am - 3 am 퇴근이 기본인 일상과 브레이크타임을 빙자한 애프터눈 서비스는 어느새 나의 일로 넘어왔고 그 안에서 점점 더 나를 몰아세워 갔다. 감정 기복이 일정치 않은 나를 보며 일하는 그들도 힘들었을 터였지만 내 경험치에 한해서 해낼 수 없는 몫이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이었다. 잘 지낸다고 생각했던 사수가 뒤에서 나를 욕한다는 소문, 내가 또 그 사수를 욕하고 다닌다는 소문, 새벽에 퇴근하고 불려가서 마녀사냥당하듯 들었던 온갖 폭언과 상식을 넘어선 그들의 잣대, 나는 어느새 소위 "윗선"의 쓰레기통이 되어있었다. 그들의 감정 쓰레기통. 그들이 화가 나면 내게 쏟아져 내리던 그들의 욕설은 내 속에 차곡차곡 쓰레기의 형태로 남았고 그들 중 하나가 내게 하소연하고 내 편인 양 달콤히 속살거리면서 뒤로는 나를 몰래 사진 찍어 오너셰프에게 넘기기까지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내게 모든 일을 부담하게 하면서 뒤로는 내 욕과 나에 대한 뜬소문을 속살거리던 그들이 내 머리 위에 그들의 감정 쓰레기를 부어버린 그 어느 날이었다.


새벽 4시, 집에서 부엌 불 하나를 덩그러니 켜놓고 편의점 도시락과 컵라면 그리고 소주 두 병을 마주하고 앉았다. 바람을 쐬지 못해 쩍쩍 살이 갈라져 피가 나다 곪아버려 고름이 고인 내 두발을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사람이 상황을 만드는 걸까,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걸까?" 이간질로 인해 사수가 나를 대하던 태도가 변했고 속살거리는 소리에 홀려 나 또한 사수를 미워했다. 후임과 트러블이 잦은 내게 "쟤 자를까? 나도 귀찮고 맘에 안 들어. 일하는 거 봤냐" 며 내게 동의를 끌어내려 하는 그 말들에 나를 위로하려 한다 착각했다. 내 맘을 알아준다며 동앗줄인 마냥 그 사람을 부여잡았다. 그냥 모두 나를 본인들 편한 쪽으로 이끌어가려 꾀려 한 것에 불과한 것을 나는 그리도 몰랐다. 모두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상황에서 더욱 서로를 의심하고 미워하고 날카로워져 갔으며 앞에서는 웃고 뒤에서는 칼을 꽂았다. 사람이 상황을 만들었고 상황이 사람을 만들었다. 무엇이 시작이고 끝인지 알 수 없는 무한루트. 사람이 상황을 만드는 걸까, 상황이 사람을 만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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