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살아가면서 여러 상처를 주고 받으며 살아가고 넘어져보며 살아간다. 그 중 자각하지 못한 채 마음 속에 트라우마의 싹이 틘다. 트라우마에는 다양한 원인들과 감정선들이 얽혀있다. 예를 들면 학창 시절 따돌림, 성장 과정에서 생긴 가족으로 인한 상처, 직장 내 성추행 및 성희롱 혹은 폭력, 그리고 이성 등등에 관한 트라우마는 현재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의 삶에서 감내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스스로를 좀먹는 상극의 트라우마로 자리잡혀있다.
물리적인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딱지가 앉고 떨어지면 새살이 돋아나지만 정신적인 그리고 마음의 상처는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모두 치유되고 성장의 밑거름이 되진 않는다. 각자의 치유의 과정도 다르고 시간도 다르다. 그 안에서 각자의 해결 방식을 터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좀 먹어가는 상극의 트라우마는 그 과정 속에서 아물지 못하고 곪아버린 방치된 상처를 말한다. 그리고 더 깊숙한 통증으로 우리를 옭아매며 살아간다. 마치 가벼운 상처인 줄 알고 별일 없는 듯 지나갔다가 곪아 터져 흉터로 남아버리는, 초기에 잘 치료했다면 다쳤는지도 몰랐을 것을 어느새 이제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버린 것과 같다.
그런 의미가, 의도가 아니었다는 가해자들, 그들은 폭력을 애정이라 부르며 트라우마의 원인이 되었고 그들에게 우리가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기란 힘든 일이다. 대개 "미안해"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그래, 괜찮아"라며 사과를 받을 거로 생각하지만, 그 순간 그들이 느껴야 할 죄의식은 상실되고 만다. 사과를 받아줄 이유도 없을 뿐더러 굳이 사과받으려 하지 말자. 사과를 받아도 그 상처, 악몽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사과를 받고 내가 용서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
상극의 트라우마는 평온한 내 일상에 잔잔히 떨어지는 낙수, 그리고 아이가 연못에 던지는 작은 조각 돌이 내뿜는 파문처럼 서서히 나를 잠식하고 야금야금 좀먹어간다. 나를 계속 보채는 아이와 같은 트라우마, 어둠이 찾아와 세상이 잠들었음을 알리는 시간, 우리는 휴식을 취하고자 하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남들과 같은 수면을 소유할 수 없다. 상극의 트라우마를 품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안온한 수면이란 꿈 끝자락 어딘가 허망한 이야기일 뿐이다.
그렇다면 공생하는 트라우마는 뭘까. 어떻게 트라우마와 공생하며 나의 삶을 일구어나갈 수 있을까?
당신이 정말 그를 더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는지 생각해보자. 사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했고 속죄했으며 당신에게 얼마나 미안해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당신의 마음이 편안한지, 당신의 밤이 평온한지, 당신의 내면이 잔잔한 생활 백색 소음뿐인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다 당신은 어느 순간 주체하기 힘든 가느다란 물줄기를 눈에서 흘기기도 할 것이고 괜찮다며 되뇌고 자기합리화를 할 수도 있다. 혹은 이 모든 것들을 회피할 수도 있고 그저 내버려 둘 수도 있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내 세상이 무너졌다' 라는 감정에 허우적대며 아파할 것이고 괴로워할 것이다. 하지만 내버려 두거나 피하는 것은 앞으로 행복해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부정당하고 상처받고 거절당하고 세상에 내가 속한 곳은 어디에도 있을 것 같지 않을때, 그 때 다시 나만의 세상을 재건축 해야한다. 그렇게 단단해지면서 우리의 세상은 견고해진다. 트라우마 속의 안쓰러웠던 나를 돌아보며 내가 나를 안아주고 토닥일 때가 온다. 온전히 내가 나를 지탱할 수 있을 때 공생하는 트라우마를 마주할 수 있다.
그 시간들이 자양분처럼 우리를 거대한 나무처럼 자라게한다. 공생하는 트라우마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안고 어르고 달래며 같이 살아가는 것과 같다.
나는 트라우마와 공생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