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RAN Nov 14. 2021

공생하는 트라우마

삶에는 여러 트라우마가 있다. 학창 시절 따돌림, 어디를 가든 꼭 있는 남을 괴짜 혹은 별종이라 정의 짓고 특이하다며 배척하는 어떤 무리, 성장 과정에서 생긴 피치 못할 가족으로 인한 상처, 직장 내 성추행 및 성희롱 혹은 폭력, 폭언 그리고 이성에 관한 트라우마와 같은 삶에는 감내하고 살아가야만 하는 여러 가지의 감정선들이 얽혀있다.


사실 사람이라면 모두 상처를 받고 치유하고 성장하고 또다시 상처받지만, 곧 치료하는 각자의 삶의 방식을 터득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 무수히 많은 상처 중 깊은 상처들은 아물지 못하고 곪아버린다. 그리고 더 깊숙한 통증으로 우리를 옭아매며 살아간다. 마치 가벼운 상처인 줄 알고 별일 없는 듯 지나갔다가 곪아 터져 흉터로 남아버리는, 초기에 잘 치료했다면 다쳤는지도 몰랐을 것을 어느새 이제는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아버린 것과 같다.


그런 의미가, 의도가 아니었다는 그들에게, 폭력을 애정이라 부르는 그들로부터 우리가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기란 힘든 일이다. 대개 "미안해"라고 말하면 상대방이 "그래, 괜찮아"라며 사과를 받을 거로 생각하지만, 그 순간 그들이 느껴야 할 죄의식은 상실되고 만다. 사과받으려 하지 말자. 사과를 받아도 그 상처, 악몽 이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 사과를 받고 내가 용서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과 같다. 


당신이 정말 그를 더 미워하지 않을 자신이 없는지 생각해보자. 사실 그가 그동안 얼마나 힘들어했고 속죄했으며 당신에게 얼마나 미안해했는지는 중요치 않다. 그저 당신의 마음이 편안한지, 당신의 밤이 평온한지, 당신의 내면이 잔잔한 생활 백색 소음뿐인지가 중요할 뿐이다. 그러다 당신은 어느 순간 주체하기 힘든 가느다란 물줄기를 눈에서 흘기기도 할 것이고 괜찮다며 되뇌고 자기합리화를 할 수도 있다. 혹은 이 모든 것들을 회피할 수도 있고 그저 내버려 둘 수도 있다. 하지만 평온한 내 일상에 잔잔히 떨어지는 물방울, 그리고 아이가 연못에 던지는 작은 조각 돌이 내뿜는 파문처럼 서서히 잠식하는 트라우마가 나를 내버려 두지 않고 야금야금 좀먹는다. 나를 계속 보채는 아이와 같은 트라우마, 어둠이 찾아와 세상이 잠들었음을 알리는 시간, 우리는 휴식을 취하고자 하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남들과 같은 수면을 소유할 수 없다.


우리에게 안온한 수면이란 꿈 끝자락 어딘가 허망한 이야기일 뿐이다. 트라우마는 갓 태어난 아기처럼 안고 어르고 달래며 같이 살아가는 것과 같다. 이미 내 머리 어딘가 파편화된 기억들은 각인되어 치유와 치료는 사막의 신기루처럼 아지랑이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일 뿐이다.  나는 트라우마와 공생하기로 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