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스물. 법적으로 성인이라고 규정된 숫자. 그리고 법적으로는 성인이지만 ‘어른’은 아닌 사회적 관념으로써의 성년.
20살에게는 아직 10대의 천진함이 남아있다. 나의 20살은 사소한 걱정을 최대의 고민이라며 나의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는 데에 주저가 없었고 타인에 대한 무한한 신뢰, 하늘을 찌르던 자존감 그리고 빛나는 두 눈동자로 가득했다. 내 20살은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거칠게 나이프로 발라놓은 것처럼 거칠지만 입체적이었고 다채로웠다.
어느덧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던 2021년의 나는 후천적으로 낯가림과 약간의 공황장애, 인과관계가 뚜렷하지 않은 호의를 가지고 다가오는 타인을 볼 때면 물음표를 달은 사소한 의심이 고개를 드는 것에 익숙했다. 모두 직장인이 된 친한 대학교 친구들에게조차 깊은 ‘나’를 드러내지 않게 되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물감을 마르지 않은 상태에서 계속 덧칠하는 의미 없는 붓질처럼 내 세상은 알 수 없는 어지러운 붓의 흔적들이 거뭇거뭇 도배되어있다. 누구는 이런 과정이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라며 나에게 위로를 포장한 본인의 잣대를 겨누고는 했다. 길거리에서 근심 없는 웃음소리와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걸어가는 타인들을 볼 때면 종종 시샘에 가득 찬 세모꼴의 눈을 하고 바라보게 되는 이런 삐뚤어진 마음조차 ‘어른’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다들 그렇게 어른이되.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이지,” 22살, 첫 직장을 퇴사하며 직장 선배가 인간관계에 지친 내게 해주었던 말이다. ‘당신이 말하는 그 ’ 어른‘. 현재의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 이제는 이해한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아쉬운 소리를 하며 쓴소리는 끝내 삼키는, 사회가 원하는 "어른"의 탈을 쓰고 어른들 사이에 섞여 무사히 삶을 살아내고 있다. 마음속에는 불쑥 '나는 그렇게 살아가고 싶지는 않아.’라는 이성과 감성 사이의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넣어놓고 살아가는 지금, 나는 ‘어른’에게 물음표를 찍는다.
20대 중반 언저리가 되면 종종 나와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어른’이 뭐길래 다들 우리에게 ‘어른’이 되라며 강요를 하는지. 말을 많이 해도 눈치가 보이고 말을 적게 해도 문제가 된다. 너무 웃으면 만만해 보이고 그렇다고 너무 웃지 않으면 화났냐며 “사회생활 허투루 했니? 사람이 웃어야지.”라고들 한 마디씩 던진다. 속에 없는 말을 못 하던 아이는 어느새 때에 따라 잘 웃고 듣기 좋은 말도 잘하는 그들이 원하는 ‘어른’이 되어간다.
종종 ‘그저 나의 생각일 뿐 타인은 아닌가? 그때 그 선배의 말에 갇힌 걸까?’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각자가 가진 ‘어른’의 정의는 모두 다르다. 또한 개개인이 보고 자란 혹은 겪은 ‘어른’ 역시 다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어른’은 부모님, 선생님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해주던 울타리 바깥으로, 비포장도로에 내던져졌을 때 마주하는 모난 돌과 거친 흙, 우리를 아프게 하는 바깥의 ‘어른’을 말한다. 내가 겪은 바깥‘어른’들의 절반은 시기와 질투가 난무하며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지켜내거나 입증하려는 사람, ‘애정’을 빙자한 폭력으로 자아실현하는 사람 등등 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의 "어른" 말고 바깥의 ‘어른’도 말고 ‘프로 성인’이 되기로 했다.
“프로가 된다는 것은, 당신이 하고 싶은 모든 일을 당신이 하고 싶지 않은 날에 하는 것을 말한다." 미국 NBA 농구선수 ‘줄리어스 어빙’이 한 말이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본 의도와는 다르지만 내가 되고자 하는 ‘프로 성인’이 느끼는 것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사회에 내던져진 나는 점점 시간이 흐를수록 하고 싶은 일보다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했고 하고 싶은 일은 하기 싫은 날에 해야 했다. 이제는 무뎌져 그저 하나의 연속적인 과정 혹은 감내해야 하는 내 선택의 부산물이라 생각하지만 이런 것이 바깥의 ‘어른’들로부터 나를 지키는 보호막이 되어주었다. 감정적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냉정해 보일 수 있는 사무적인 태도가 도움 된다는 것, 듣지 못한 척, 모르는 척하고 사는 게 속 편하다는 것. 내가 세운 나의 보호막, ‘프로 성인’이다.
‘프로 성인’은 어른과는 결이 다르지만 아직은 덜 성숙한, 성인 중에서는 ‘프로’처럼 어느 정도 적절히 대처할 줄 안다는 뜻이다. 한 분야의 ‘프로’가 된다는 것은 사실 그 세계 안에서 닳고 닳아 경쟁 속에서 쟁취함으로써 이루어내는 업적이다. 조직, 혹은 집단은 인간이 만드는 것이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조직과 집단이 생기고 사회생활이라는 이름을 내건 인간관계를 무사히 해내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사람은 ‘프로’가 된다. ‘프로’가 되면 웬만한 일에는 무뎌진다. 이미 겪어본 일은 대처방안 혹은 방법을 알고 있는 것처럼 크게 걱정되지 않는다. ‘프로’라는 단어는 나에게는 한 편으로 동경의 단어였지만 ‘어른’과 ‘성인’ 사이에 두어 ‘프로 성인’이라고 표현하자니, 마음 한구석이 시큰시큰, 조금 서글픈 마음이다.
우리는 각자의 지도 속 아픈 지점을 지나가고 있다. 그 안에서 우리는 바깥의 ‘어른’을 만난다. 그리고 종래에는 온전한 ‘나’라는 대륙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 과정에서 각자의 보호막을 만들어 갈 것이며 나중에는 오롯한 자신을 지켜내어 ‘어른’이 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현재 ‘프로 성인’이 되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