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흰
쳅터 2. 그녀
1. 성에
공기가 완전히 차단되지 않는 유리창에 성에가 낀다.
2. 서리
첫서리는 고운 소금 같다.
3. 날개
하얀 나비 하 마리가 십일월 아침 갈대숲 옆에 날개를 접고 누워 있었다.
4. 주먹
움켜쥘수록 차가워지는 자신의 창백한 두 주먹을.
5. 눈
정육각형의 그 신비한 형상이 조금씩 녹아 사라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고작 일, 이 초.
6. 눈송이들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7. 만년설
그가 갈 수 없는 곳. 얼어붙은 아버지의 몸이 숨겨진,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얼음의 땅.
8. 파도
뭍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9.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발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컹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10. 흰 개
개는 개인데 짖지 않는 개는? 그 수수께끼의 싱거운 답은 안개다.
11. 눈보라
이 차갑고 적대적인 것은? 동시에 연약한 것, 사라지는 것,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이것은?
12. 재
그 빛과 소리들 가까이, 어머니의 재는 돌로 된 서랍 속에서 변함없는 고요할 것이다.
13. 소금
희끗한 그늘이 진 굴곡진 입자들이 서늘하게 아름다웠다.
14. 달
보름의 달을 볼 때마다 그녀는 사람의 얼굴을 보곤 했다. 생각에 잠긴 거대한 흰 얼굴에서 스며 나오는 빛, 거대한 캄캄한 두 눈에서 배어 나오는 어둠 속을.
15. 레이스 커튼
새로 빨아 바싹 말린 흰 베갯잇과 이불보가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16. 입김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17. 흰 새들
수평선으로 서서히 기우는 서쪽의 해를 향해 새들은 앉아 있었다. 무슨 침묵의 의식을 치르는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영하 이십 도의 추위 속에서 일몰을 지켜보고 있었다.
18. 손수건
손수건 한 장이 가장 느리게, 마지막으로 떨어졌다. 날개를 반쯤 접은 새처럼. 머뭇머뭇 내려앉을 데를 살피는 혼처럼.
19. 은하수
알알의 소금 같은 수천의 별들. 한순간 눈을 써어 어떤 것도 기억할 수 없게 하던 차고 깨끗한 빛들.
20. 하얗게 웃는다.
아득하게, 쓸 하게, 부서지기 쉬운 깨끗함으로 웃는 얼굴. 또는 그런 웃음.
21. 백목련
어둠을 안고 타오르는 텅 빈 흰 불꽃들-그것이 삼월에 짧게 꽃피는 백목련 두 그루인 걸까?
22. 당의정
마치 인생 자체가 그녀의 전진을 원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반복해서 아팠다.
23. 각설탕
어떤 기억들은 시간으로 인해 훼손되지 않는다. 고통도 마찬가지다. 그게 모든 걸 물들이고 망가뜨린다는 말은 사실이 아니다.
24. 불빛들
그렇다 해도 저 불빛들은 여전히 명료한 정적과 고립 속에서 하얗게 얼어붙어 있을 것이다.
25. 수천 개의 은빛 점
그러던 한순간, 수천의 은빛 점들이 먼바다에서부터 밀려와 배 아래를 지나갔다........ 멸치 떼가 지나갔다야.
26. 반짝임
빛나는 물은 깨끗한 물이다. 마실 수 있는 –생명을 주는- 물만이 투명하다.
27. 흰 돌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28. 흰 뼈
청회색 바닷속 같은 뢴트겐 사진 속에 희끗한 해골 하나가 서 있었다.
29. 모래
그리고 그녀는 자주 잊었다. 자신의 몸이 (우리 모두의 몸이) 모래의 집이란 걸.
30. 백발
새의 깃털처럼 머리가 하향게 센 다음에 옛 애인을 만나고 싶다던 중년의 직장 상사를 그녀는 기억한다.
31. 구름
거대한 흰 구름과 검은 구름 그림자가 빠른 속력으로 먼 하늘과 땅에서 나란히, 함께 흘러나아 갔어.
32. 백열전구
영원을 우리가 가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위안이 되었던 시간 따위는 없었던 것처럼.
33. 백야
완전한 빛이나 완전한 어둠이 되지 않은 하루들은 과거의 기억들로 일렁거린다.
34. 빛의 섬
저 해저 같은 어둠 속으로 더듬더듬 걸어내려 갈 것인지, 이 빛의 섬에서 더 버틸 것인지.
35.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자신을 버린 적 있는 사람을 무람없이 다시 사랑할 수 없는 것처럼, 그녀가 삶을 다시 사랑하는 일은 그때마다 길고 복잡한 과정을 필요로 했다.
36. 흩날린다
저물기 전에 물기 많은 눈이 쏟아졌다. 보도에 닿자마자 녹는 눈, 소나기처럼 곧 지나갈 눈이었다.
37. 고요에게
조금 더 이대로 있어달라고. 아직 내가 다 씻기지 못했다고.
38. 경계
여전히 눈을 뜨지 않은 채, 지금 자신이 넘어오고 있는 경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39. 갈대숲
밤사이 내린 눈에 덮인 갈대숲으로 그녀가 들어선다...... 살풍경함과 아름다움 사이에서 절반쯤 얼어 있는 그 늪가를 벗어난다.
40. 흰나비
그 길은 눈이나 서리 대신 연하고 끈덕진 연둣빛 봄 품들로 덮여 있을지도 모른다.
41. 넋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42. 쌀과 밥
방금 지은 밥을 담은 그릇에서 흰 김이 오르고 그 앞에 기도하듯 않을 때, 그 순간 느낄 어떤 감정을 그녀는 부인하지 못한다. 그걸 부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