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네가 7년을 케냐에서 살면서 많이 이사를 다녔었는데 이곳에서 살았을 때가 가장 행복했었다며 우리에게 그 집을 소개를 했다.
집보다 정원이 몇 배로 넓었던 집에 길버트라는 케냐 청년이 게스트하우스에 살게 되었다. 시골 선교를 가시던 한국 선교사님을 만났고 길버트 나이 15살에 나이로비로 상경을 한 것이다. 그는 초등학교만 다녔고 '카렌 진'이라는 부족이었다. 우리가 그를 만났을 때 나이는(2008년) 이십 대 초반쯤이었다. 길버트는 키가 크고 외모가 잘생겼고 평소에는 말이 별로 없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그가 우리 집에서의 역할은 문지기요 정원사였다.
1,200평이나 되는 넓은 땅 가운데에는 영국 식민지 때 지어진 오래된 집이 있었다. 우리는 한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넓은 땅을 활용하며 차 두대가 들어갈 수 있는 주차장을 개조해서 센터와 교육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방이 4칸이 되는 가정집은 한국에서 온 대학생 봉사자들과 함께 생활을 했다. 치안이 좋지 않은 나라이니 밤마다 세 마리의 큰 개들을 풀어놓고 세큐리티 회사에 등록을 해 놓았다. 꽤 안전한 동네이지만 종종 이곳저곳에 도둑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곤 했다.
가사 도우미로 일하던 메리는 건강하고 성실한 케냐 아가씨였다. 메리는 목사님 딸이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교회 여성 도로부터 우리 가정이 케냐에 온 다는 소식을 듣고는 오랫동안 기도를 하며 우리 집에서 일하기를 간절히 기다렸다고 한다.
길버트와 메리는 우리 식구와 2년 가까이 중국식 식탁에서 함께 점심을 먹었다.
우리들의 점심 메뉴는 우갈리(옥수수 가루로 만든 케냐 주식)와 짜파티(밀가루로 만 만든 부침개), 비프스튜, 기데리(콩, 옥수수, 여러 야채를 섞어 만든 음식)와 쑤꾸마(케일) 볶음인 케냐 음식이었다. 한국요리는 볶음밥 밥과 카레를 자주 먹었다.
어느 날 어느 분이 날짜가 1년이나 지난 짜파게티와 신라면을 몇 박스 주었다. 라면 수프는 이미 떡처럼 굳어서 먹을 수 없었고 면에서 조차 오래된 기름 냄새가 났지만 라면이라는 자체가 귀했기에 면을 한번 삶아 헹구워서 소스를 만들어 볶음면으로 즐겨 먹었다.
길버트와 메리는 처음에 검은색 음식인 짜파게티와 짜장밥을 먹지 않았어다. 자기들은 태어나서 검은 음식은 처음 본다며 손도 데지 않았다. 배추김치와 깍두기는 잘 먹으면서도 말이다. 삶아낸 면에 각종 채소와 고기를 넣고 중국식 짙은 검은색 소스를 넣고 한국식 불고기 소스로 면을 볶아내자 호기심으로 한입을 먹더니 두 눈이 커지면서 나중에는 최애 음식으로 꼽을 정도로 즐기게 되었다. 한국분이 춘장을 주셔서 한동안은 짜장 소스를 만들어 오래된 면을 삶아 짜장면처럼 먹기도 했다. 한국 채소 부침개를 먹으면서는 리치한 짜파티라고 하며 우리들의 점심 식탁은 참으로 화기애애했다.
우리 아이들은 길버트 집에 놀러 가는 것을 좋아했다. 저녁을 일찍 먹는 아이들은 저녁 8시만 되면 요리를 하는 길버트 집을 찾아갔다. 그가 만드는 우갈리와 쑤는구먼 볶음, 짜파티와 가끔씩은 고급진 팬케익을 얻어먹었다. 길버트는 아무 불평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자기 살점과도 같은 양식을 나누는 맘이 귀해서 나는 고마움으로 그에게 고기와 계란 그리고 밀가루와 설탕을 선물로 전했다. 우리 아이들은 길버트를 한국 발음으로 '삼촌'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길버트를 신뢰하고 좋아하게 된 이유는 그와 지낸 지 1년이 지난 6월이었다. 온 가족이 해안도시로 콘퍼런스를 가게 되었다. 새벽 일찍부터 집에서 나오다 보니 콘퍼런스 비용을 어딘가에 떨어트렸던 것이다. 10시간 넘게 차로 달려 도착한 콘퍼런스 장소에서 그 사실을 알게 되자 남편은 고민을 했다. 집 정원 어딘가에 돈이 떨어졌을 텐데 길버트가 돈을 줍기라도 하면 그에게 큰 유혹거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부주의한 행동으로 좋은 사람을 잃을까라는 염려였다. 그렇게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남편은 길버트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길버트에게 어디쯤에 돈봉투를 떨어트린 것 갔다며 그에게 확인을 부탁했다. 금방 그에게서 답이 왔다. 돈을 찾았고 자기가 주워서 잘 보관하겠다고 말이다.
가끔씩 한국인이 우리 집에 와서 점심을 먹게 되면 길버트와 메리와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불편해하는 눈치였다. 그들은 많은 충고를 아낌없이 우리에게 해주었다. 사실 한국인들을 더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길버트와 메리인데 말이다.
우리는 길버트에게는 운전학원을 다니도록 했고 메리에게는 컴퓨터 학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지원을 했다. 젊은 그들에게 좀 더 나은 일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길버트는 2년, 메리는 3년을 우리와 함께 일을 했다.
우리가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면서 사무실을 시내에 따로 얻게 되었다. 2년 동안 우리 집에서 일하던 길버트는 다른 한국분 집으로가게 되었고 3년 동안 함께 했던 메리는 케냐 회사 사무실로 출근하게 되었다.
첫 안식년을 한국에서 보냈을 때 두 딸이 4살, 5살이었다. 한국에서 잠시 어린이집을 다녔었다. 어느 날 스케치북에 친구들을 그린 그림을 가지고 왔는데 얼굴과 팔다리에 검은색이 칠해져 있었다. 아프리카에서 자랐던 울 아이들은 친구들은 그냥 친구였다. 케냐에서는 유치원을 가든, 마트를 가든, 교회를 가든 검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이 더 많았고 당연한 것이었다. 아들이 9살 때 한국을 잠시 방문했다가 외할아버지 댁에 간 적이 있었다. TV를 보다가 검은색 피부를 갖은 어린이들이 나오자 할아버지가 '검둥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아이는 "할아버지 제 친구들에게 검둥이라고 하지 마세요. "라고 말하며 울먹였다. 어린 손주 앞에서 할아버지는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조지 프로이트'의 죽음을 애도하며 한 식탁에서 오랫동안 점심을 먹으며 교제하던 '길버트와 메리'가 생각이 났다.
아프리카에서 살고 있는 나에게 많은 숙제가 생긴 것 같아 마음이 무겁다. 내 생각과 마음으로 차별을 두고 있는 것이 어떤 것들이 있는지 돌아본다.
아이들이 친구란 피부색과 상관없이 친구라고 말한 고백 앞에 나 또한 부끄럼 없이 살아가길 다짐해 본다.